-SSN 신청, 핸드폰 개통, 학교 입학
12월 2주간 남편이 휴가를 냈다. 휴가 기간 남편은 목 디스크로 휴식이 필요했지만 제대로 쉬지 못했다. 우선은 나와 아이들보다 나흘 먼저 도착한 짐을 풀어야 했고 나와 아이들이 도착한 뒤로는 내 SSN(Social Secuity Number) 신청이나 아이들 휴대폰 개통 등의 일을 도와줘야 했다.
남편은 SSN을 신청하고 수령하기까지 3주 이상 걸렸다. 반면에 나는 일주일도 안 되어 받았다. 미국의 행정은 가는 곳, 처리하는 사람마다 업무 처리 방식이나 처리 속도가 다르다. 우리나라처럼 행정업무가 균일한 방식으로 신속히 처리되지 않는다. 미국에 오면 여유로운 삶을 산다고? 글쎄, 여유로 포장한 느림을 견딜 수밖에 없는 것을 미화한 건 아닐지 모르겠다. 내 SSN 신청 시 남편이 통역을 대신했는데, 내가 영어를 못한다 해도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밀브레(Millbrae)는 산 마테오 카운티(San Mateo County)에 속했는데, 그곳 SSA(Social Secuity Administration)에서는 스페인어, 한국어, 중국어 등의 통역 서비스를 제공했다.
아이들의 스마트폰 개통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한국에서 쓰던 아이폰은 미국에서 바로 개통이 가능했다. 이런 일처리는 남편이 했다. 아마 남편이 아니었다면, 나로서는 통, 번역기를 쓰면서 소통하느라 애먹었을 것이다. 딸 1에게는 남편이 쓰던 아이폰을 줬고, 딸 2는 쓰던 아이폰을 그대로 썼다. 딸 1이 한국에서 쓰던 삼성폰은 내 차지가 되었다. 그런데 아이폰과 달리 한국에서 쓰던 삼성폰은 아무 통신사에서나 개통되진 않았다. 우리 집 홈 와이파이로 쓰는 x-finity나 메이저 통신사 중 하나인 verizon에선 삼성폰을 개통할 수 없었다. 그래서 한국에서 쓰던 LG 폰에 로밍 요금제 한 달을 신청했는데, 미국 현지 핸드폰을 개통할 때까지 썼다.
삼성폰에 적합한 통신사를 찾던 중, 로밍 통신사가 t-mobile이어서 t-mobile은 가능할 것 같았다. 그래서 대리점에 찾아갔더니 삼성폰 개통이 가능하단다. 내 짧은 영어로 개통 가능 사실만 확인하고 주말에 남편과 같이 가서 데이터 무제한 선불 요금제에 가입했다. 요금제 가입 당시, 대리점 사장이 나름 저렴한 요금제를 찾아준다며 내게 몇 살이냐고 물었다. "포티 투 이어즈 올드." 그는 내게 시니어 요금제를 추천하려다 말았다. 처음엔 그가 한 말을 못 알아들었다가 남편이 통역해 준 내용에 화가 났다. 그는 내가 시니어가 아닐 거라고 짐작은 했지만 시니어 요금제가 저렴해서 물어봤던 거라고 둘러댔다. 다른 인종의 나이를 가늠하는 것은 어렵다며 미안해했다. 그러나 이미 내 기분은 와장창 깨졌다. 불편한 감정을 표정에만 드러낼 뿐 영어로 돌려 까기를 하지 못해서 아쉬웠다. 짧은 영어로 인도계 미국인인 대리점 사장 나이라도 물어볼 걸 그랬다. 대리점을 나오며 속으로 '하우 올드 아 유? 안튜 올드 이너프 투 리타이어.' 중얼거릴 뿐이었다.
현지에 와서 처리해야 할 일 중 아이들 입학이 최우선이었다. 아이들이 집에서 빈 둥거리지 않고 바로 학교에 다니길 바랐다. 그래서 입국하기 전에 미리 학교 등록 서류를 메일로 보내놓았다. 구비 서류 중 TB테스트(결핵 테스트, 아시아에서 이주해 온 경우 X-ray로는 안 되고 blood 테스트를 받아야 했다.) 결과지가 필요한데 TB 테스트를 반드시 현지에 와서 받으라고 했다. 미국은 소아과나 가정의학과 어디든 진료를 보려면 미리 예약을 해야 하는 시스템이다. 신규 환자의 경우 예약 후 첫 진료까지 보통 2주 정도 걸린다고 들은 바 있다. 그래서 출국하기 전에 남편에게 직장 보험이 개시되었으면 보험 In-network 내에 있는 집 근처 소아과나 가정의학과 진료를 전화로 예약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남편은 그런 도움을 내게 주진 않았다. 목디스크로 인한 통증이 심한 데다가 일은 바쁘고 집에 오면 얼 것 같은 추위에 무엇인가를 알아보는 것이 힘들다고 했다. 남편은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나는 실은 그가 가늠할 수 없는 미국 병원비에 덜컥 겁이 났던 것은 아닌가 의심했다.
가정의학과를 미리 예약해 두었다면 copay가 들긴 했겠지만, 환자 등록을 해 놓아서 이후 아플 때 병원 예약하기 쉬웠을 터이다. 남편은 병원만 가면 예금 통장 거덜 내는 줄 알았는가 보다. 아직 미국 병원에 한 번도 가 보지 않아서 병원비가 어느 만큼 사악한지는 모르겠다. 그런데 살다 보면 병원 갈 일이 생길 수 있으니 초기 비용이 좀 들더라도 주치의를 지정해 놓거나 증상이 있을 때 미리 예약을 해 두는 편이 병원과 담쌓고 지내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한다. 목디스크가 도무지 나아지지 않아서 남편이 병원을 알아봤더니 한 두 달 뒤에나 진료일을 잡을 수 있었다. 미국에서 아프면 의사 기다리다 회복되거나 죽는다던 말이 생각났다.
아쉬운 대로 CVS minute clinic에 가기로 결정했다. CVS minute clinic은 예약은 물론 워크인(walk-in)도 가능한 곳이다. 가벼운 질환에 임상 간호사가 약을 처방해 주거나 독감, 코로나, 결핵 검사 등을 의뢰할 수 있다. 입국하고 다음 주에 바로 CVS minute clinic에 가서 검사를 의뢰했다. 그곳에서 검사소(Lab.)를 지정해 줬다. Lab이 쉬는 날이어서 집에 돌아와 다음날 Lab에 검사를 예약하고 의뢰서를 들고 갔다. 간호사가 혈관을 찾지 않고 팔뚝에 바로 주사를 꽂았다. 1초 만에 채혈이 완료됐다. 기계를 이용해 혈관을 찾는 과정 없이 혈액이 채취되는 점이 신기했다. CVS minute clinic에 의뢰했던 것은 비용이 발생하지 않았지만 Lab에서 테스트한 것은 비용이 발생했다. 보험이 적용되었더라도 디덕터블(Deductible) 이하의 요금이라 검사료를 지불해야 한다. 검사비로 아이 한 명당 44$을 지불했다. 세브란스에서 10만 원 정도 든다고 했던 것에 비하면 현지에서 검사받는 것이 더 저렴했다. 산 마테오 카운티에서 운영하는 mobile clinic(이동형 진료소, 워크인(walk-in이 가능하다.)에 가면 아마 무료일 듯하지만, 요일이 지정되어 있었고 부랑자들도 이용하는 곳일 듯해서 이용하지 않았다.
TB 테스트 결과지 받자마자 학교 입학 담당자에게 보냈다. 학교 등록 관련 서류를 모두 보냈고, 이메일로 미국 학교에 처음 입학하는 것이라고 알렸지만 입학 담당자는 내게 온라인 등록도 마치라고 웹사이트 링크를 보내주었다. 그곳에 예방접종 기록이며 내가 작성한 서류 내용을 다 입력해야 했다. 작성하면서 이게 내가 할 일이 아닌 것 같다는 의문이 들었다. 미국 내에서 전학하는 경우에 해당하는 내용을 쓰는 칸이 있어서 뭔가 착오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에서였다면 담당자에게 당장 전화해서 문의했겠지만, 여기는 미국. 게다가 내 짧은 영어로는 무엇인가를 구체적으로 따져 묻고 상대의 말을 알아듣는 것이 어려웠다. 그래서 요령껏 내용 입력을 마쳤다. 등록 완료 메일을 보내자 금요일부터 학교에 나오라는 답변을 받았다. 그런데 이곳 일처리가 군더더기가 많고 깔끔하지가 않다. 어플로 입력하라던 내용은 내가 메일로 이미 입학담당자에게 보냈던 것인데도 또 입력해야 했고, 이후 입학 후에 다시 서류 뭉치를 주면서 필기로 입력을 요구했다. 필기 입력 시에 어플로 작성했던 내용과 전화번호에 변경 사항이 생겨 수정해서 제출했다. 그런데 신상 정보에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 학교에서 쓰는 앱에 잘못된 정보가 올라왔다. 비상 연락처 정보가 틀렸다. 영어로 의사소통이 좀 더 편해진 뒤에 학교 사무실에 전화해서 몇 가지 틀린 정보를 수정했다.
아이들 학교 출석 첫날, 학교 사무실에서 입학하기까지 2주 정도 메일로 소통했던 에반스 여사를 만났다. "오우, 스위트 허어어트! 나이스 투 밑 유!" 과장된 말투와 표정이 내겐 어색했다. TB 테스트를 반드시 현지에 와서 받아야 한다고 요구했던 점이 떠올라, 그녀의 과장된 친절이 친근하게 느껴지진 않았다. 학습 스케줄을 보여 달라고 했고, 아이들 간식 시간과 점심시간을 보고 도시락을 준비하지 않았는데 어떡하냐고 물었다. 에반스 여사가 활짝 웃으며, "유 돈 니드 투 워리 어바웃 잇. 런치 이즈 프리!"라고 말했다. 그 모습을 본 남편은 가난한 나라에서 온 아시안 엄마가 점심 걱정을 하는 모습에, 미국은 점심을 공짜로 준다며 자랑하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고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녀가 나름 자랑스러워할 만한 이유가 있었다. 작년까지 캘리포니아 급식은 유상이었는데 이번 해부터 무상 급식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아이들은 그녀에게서 남편과는 다른 점을 봤다. 에반스 여사가 혀를 죽 내밀고 엄지에 침을 잔뜩 발라서 서류 뭉치에서 급식표와 스케줄표를 찾아서 내게 주었다 했다. 아이들은 그날 저녁을 먹으며 이러니 코로나로 수만 명이 죽은 것이 아니냐는 얘기를 했다. 이후로 우리는 에반스 여사를 묘사할 때마다 "오우, 스윗 허어어트!"라고 말하며 혀를 내밀어 엄지에 침을 잔뜩 바르는 흉내를 냈다. 나는 그녀의 과장된 미소와 말투를 말 안 통하는 아시안 학부모와 말 안 듣는 아이들을 상대하며 터득한 나름의 사무적 기술일 거라고 짐작했다.
주요하게 처리할 몇 가지 일들이 입국 2주 만에 끝났다. 남편은 출근하고 아이들은 학교에 가는 생활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