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살면 여유롭다고?

-쾌적한 환경이 부럽다.

by 백수아줌마

미국살이를 준비하며 가입한 카페에서 종종 미국이 한국보다 여유가 있어서 좋다는 애매모호한 문장을 읽곤 했다. 경제적으로 풍요롭다는 뜻인가? 그렇다면 인정, 세계 제일의 경제 대국이니 물으나 마나다. 그런데 국가가 부유한 것과 개인이 부유한 것은 별개다. 내가 빈곤하면 상대적으로 더 큰 박탈감이 들 터이다. 시간적인 여유? 글쎄, 시간 약속 제대로 지키지 않으면 곤란하다. 특히나 병원은 예약이 기본이다. 긴급한 경우 어전 케어나 이머전시 가는 방법 외엔 없다. 그밖에 모든 서비스가 예약을 해야 하고 내 사정 급하다고 빨리 처리해 주는 법은 없다. 재촉해도 달라지지 않으니 그저 기다릴 수밖에 없다. 내 조급함과는 반대로 일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급하지 않다는 것이겠고, 그런 점에서 여유가 있다는 점은 인정한다.


이밖에 무슨 여유가 있을까? 나로서는 미국에서 풍경의 여유를 느꼈다. 미국은 땅이 워낙 넓어 지역마다 기후와 풍토가 다르니 경험한 지역을 구체적으로 콕 집어 기술해야 한다. 내가 머무는 곳은 미국 서부 캘리포니아 주, 산마테오 카운티에 소속한 밀브레 시티이다. 밀브레는 샌프란시스코 공항 근처에 있는 작은 동네다. 12월 24일, 샌프란시스코 공항을 나서니 얼굴에 산뜻한 봄날 같은 공기가 닿았다. 고개를 들면 맑고 파란 하늘에 간간히 비행기가 오갔다. 남편이 렌트해 온 차를 타고 가며 창밖으로 거리를 내다봤다. 도로는 널찍하고 어디로 가든 인도가 잘 정비되었다. 이곳의 한산한 거리는 사람들로 북적이던 서울의 거리와 대조되었다. 햇살이 밝아 어디든 환해 보였다. 몇 년을 살 거라는 기약 없이 짐 싸서 들어온 곳. 처음이었다, 외국살이는. 그럼에도 낯선 곳에 대한 긴장보다는 좁은 곳에 끼어 살다가 너른 공간으로 나온 듯한 해방감을 느꼈다.


밀브레는 샌프란시스코와 산호세를 잇는, 남북으로 길게 뻗은 82번 도로를 아래로 두고 위로 산과 언덕이 병풍처럼 둘러쳐진 곳에 자리 잡은 마을이다. 82번 도로에서 동쪽으로 가면 베이가 있고, 서쪽으로 산이 있어서, 이곳 거주민의 상당수를 차지하는 중국계 사람들은 이곳을 배산임수의 풍수 명당으로 본다. 그런데 지진 때문에 고층 건물에 대한 규제가 많아 집 대부분이 저층이다. 그 덕에 사방 어디로든 막힘없는 하늘을 볼 수 있다. 다운타운의 상가 커피숍 2층에 앉아 동네를 보면 오르막을 타고 지어진 집들이 한눈에 펼쳐진다. 빽빽이 들어차지 않아 생기는, 약간의 빈 틈. 그 빈 틈이 풍경에 여유를 준다.


대부분의 마을이 주택가와 상가가 분리되어 있어서, 상가와 아주 가까운 곳이 아니고는, 대개 가벼운 장을 봐도 차로 이동한다. 그러니 거리를 오가며 쓰레기를 버리는 사람도 없고, 주택가에서 상가의 어수선한 간판을 볼 일도 없다. 그 대신 생수 한 병을 사려고 해도 상가로 몇십 분 걸어가야 하거나 차를 타고 가야 하는 번거로움을 감수해야 한다. 길 위에는 개 산책을 시키거나, 걷거나 뛰는 등의 운동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보행자가 많지 않으니 부딪힐 일이 거의 없고, 마주 오는 사람이 있을 땐, 서로 조금씩 비켜서 불필요한 접촉을 피한다. 길, 집, 사람 사이에 빈 공간이 있다. 이 틈에서 나는 쾌적함과 여유를 느낀다.


건물이 자리잡지 않은 땅은 대개 공원이나 운동장이다. 집 뒤로 작은 공원이 인접해 있는데 그곳에는 유칼립투스와 세콰이어와 같은 거대한 나무와 여느 평범한 크기의 나무들이 있다. 집들은 지어진 연대에 따라 서로 비슷한 모양을 띄기도 하지만, 어느 것 하나 완전히 같은 집은 없다. 몇몇 집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집 정원에는 레몬이나 오렌지와 같은 과실나무와 그밖에 정원수가 자란다. 또는 다육식물과 꽃들이 정원을 채운다. 집집마다 꽃을 심으니, 겨울엔 카나리아를, 봄철엔 수선화, 카라, 튤립과 같은 알뿌리 다년생 꽃을, 여름으로 가까워지면 사방에 피는 장미꽃을 감상할 수 있다. 가을이 되면 곳곳에 단풍이 들 테지만, 아직 그 계절을 살지 않았다. 이렇듯 정원이 많고 공원이 곳곳에 널찍하게 자리하고 있어 주거지라 하여도 새들이 많다. 손가락만 한 벌새부터 독수리까지 새들의 종류가 다양하다. 그러니 산책하며 집구경, 식물 구경, 새들 구경에 걸음은 가볍고 오감은 바쁘다.


한국에서는 서울 강북의 소위 역세권이라 하는 아파트 단지에서 살았다. 지하철 근처뿐 아니라, 서울에서 어디를 가든 거리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출퇴근 시간에 어깨를 부딪히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만원 지하철에선 비좁은 틈에 몸뚱이를 밀어 넣고 내릴 때까지 부대껴야 한다. 바쁜 시간대가 아니어도 동네를 산책하려고 길 위에 서면 급히 지나가는 오토바이, 바삐 가는 사람들을 피하기 정신이 없다. 한가로이 나무나 꽃을 구경할 일은 더더욱 없다. 부딪히지 않으려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내가 사는 곳이 샌프란시스코와 같은 도심이 아니어서 어쩌면 도심과 베드타운 간의 차이로 보일 수 있겠다. 그러나 한국의 소도시로 간다 해도 사정은 달라지지 않는다. 지방 소도시의 복잡함은 서울 못지않다. 낙후되거나 오래된 지역일수록 차도와 인도를 분리하지 않아, 오가는 차량과 사람을 피하느라 조심해야 한다. 그뿐인가 중심지에 단란주점, 나이트, 성인 오락실 등의 유흥 업소가 버젓이 앉아 요란스러운 간판을 걸어 놓고 손님을 부른다. 그 앞은 이용객들이 버린 담배꽁초와 음료수 캔 등을 비롯한 쓰레기들로 지저분하다. 거리의 비둘기들은 쓰레기나 토사물을 헤쳐 먹기 바쁘다.


한국은 인구의 2/3이 수도권에 모여 산다. 지방이라 하여도 중소도시에 오밀조밀 모여 산다. 좁은 면적에서 최대 효율을 끌어내어 살다 보니, 좁은 땅에 꽃과 나무는 사치이다. 나날이 들어차는 콘크리트 벽에 보도를 겸한 아스팔트 도로가 도시의 얼굴이 된다. 빽빽이 들어찬 건물, 비좁은 거리에서 여유를 부리기 어렵다. 거리의 사람들 모두가 자기 순서를 놓치지 않도록 바삐 움직여야 한다. 그래야 사람의 물결이든 차량의 이동이든 매끈하게 흐를 수 있다.


사는 환경이 다르니 어쩔 수 없겠다 싶다가도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 아무리 좁더라도 꽃 한 송이 피울 자리 하나 없을까. 골목에, 버스 정류장에, 지하철 입구에, 길가에 꽃이 핀다면 바삐 오가는 중에 눈 둘 곳 있어 즐겁지 않을까. 지자체에 따라 꽃을 심어 조경에 힘쓰는 곳이 있지만, 서울 전역이 전국이 그런 것은 아니다. 사람들 모두 즐기기엔 한참 부족하다. 꽃이든 나무든 좀 더 많이 있었으면 좋겠다. 꽃과 나무를 보고 찡그린 얼굴 잠시 펴서 환한 얼굴이 되면, 서로의 부딪힘에 인상을 찌푸리기보다는 너그러운 웃음을 지어줄 수 있을 것 같다. 빈자리에 먹지 못하는 꽃과 나무를 심겠다고 하면, 내 부모 세대는 부쳐먹을 땅이 있으면 채소를 심어야지 뭔 꽃이냐 하며 타박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들 덕에 밥술 좀 뜨게 된 나는 도시에 꽃과 나무가 심어지길 기대한다. 멀리 있어 늘 그리워하는 곳이 더 아름다워지길 희망한다. 언제고 돌아가면 주머니에 꽃씨를 넣고 걷다가 알맞은 자리에 뿌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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