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에 두 편 쓰기. 나와의 약속을 어겼다. 5월 1일. 스마트폰으로라도 써야겠다.
4월은 운전 연습과 시험으로 끔찍한 달이었다. 떨어졌기 때문에 5월에 재도전해야 한다. 이젠 그저 열심히 연습하지 말고 가끔 연습하며 내 삶을 챙겨야겠다. 그동안 운전 연습 전, 시험 전 불안을 해소하고자 매달린 것이 유튜브 쇼츠. 잡다한 연애 기사, 한국 정치 뉴스, 요리법 등을 넋 놓고 보느라 하루의 몇 시간을 흘려보내곤 했다.
오늘도 오전 몇 시간을 그렇게 날리고 보니 오후엔 하루의 일거리가 몰렸다. 약국에 가서 아이 약을 찾고, ups에 가서 택배 물품을 맡겨야 한다. 세탁해 놓은 빨래도 개켜야 한다. 택배를 맡기고 집에 오자 학교에 갔던 딸이 집에 돌아와 있다. 열이 나서 집에서 쉬던 아이가 문을 열어 주었단다. 둘에게 숙성된 망고를 잘라주었다. 지저분한 곳을 대충 치우고 점심으로 먹으려고 냉장고에 넣어 두었던 샌드위치를 꺼내 뒷마당으로 나왔다.
묵혀두었던 책을 꺼내 들었다. 영어 책을 읽든 영어 학습 앱을 하든, 영어를 공부하면 현지 사람들과 대화할 때 도움이 되련만, 지금 당장은 뭘 배우는 게 싫다. 익숙하고 좋아하는 것들을 하며 쉬고 싶다. 내겐 운전연습으로 지친 정신을 달래는 게 더 시급하다. 소소한 불안이 우울이 되지 않도록, 기분의 전환이 필요했다. 그럴 땐 일광욕과 독서가 제일이다.
요즘 읽는 책은 <곰브리치 세계사>와 <토지>. 곰브리치 세계사는 아이들 학습에 도움이 되겠지 싶어 한글 판과 영어 판을 모두 구입하여 두었는데 아이들이 읽지 않아 칼각을 유지 중이다. 서점에 선반에 고스란히 가져다 꽂아 놔도 될 판이다. 나라도 읽자 싶어 펼쳐서 관심 가는 장부터 읽어봤는데 문장이 간결해서 쉽게 읽힌다. 도판이 많이 수록되어 세계사 박물관에 온 듯하다. 중등 자녀가 읽으면 좋으련만, 안 읽으니 나라도 다 읽어야겠다. 생각보다 재미있다. 세계사의 줄기를 이해하며 그림이나 유물 사진을 감상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토지> 더 말해 무엇하랴. 겨울부터 읽기 시작해서 5권까지 진도가 죽죽 나갔는데 6권부터 쳐지다가 지금은 8권에 이르렀다. 유튜브 쇼츠 보며 허송세월하지 않았으면 좀 더 많이 읽었을 텐데, 상반기 내에 10권까지 읽는 게 목표다.
미국에 살아도 교류하는 사람은 집 근처 남편의 직장 동료 가족뿐이다. 현지 친구를 사귀자니 언어장벽을 넘기가 쉽지 않다. 재작년 겨울에 왔으니 미국 산 지 1년 5개월인데 영어 실력은 여전히 초급 수준. 줌으로 esl에 주에 한두 번 참여하는데 그마저도 요즘음 아이 배드민턴으로 라이딩하느라 불참하고 있다. 미국 면허 없이 한국 면허증으로 운전하는 것은 무면허 운전에 해당하지만, 어쩌랴. 아이 경기장이 우버 또는 자차 이용하지 않고 갈 수가 없으니 말이다.
겨울, 이른 봄에 비 많이 내리고 흐리고 추운 대신 5월부터 10월까지는 날씨가 아주 좋다. 청명한 하늘 따뜻한 햇살. 맑은 공기. 그러나 교류할 사람 없고 밤이면 집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곳. 심심한 천국이다. 가족이 아프지 않다면야 오래 살고 싶은 곳이다. 그러나 병원 이용이 잦은 우리 가족이 영구히 살 곳은 아니다. 게다가 이곳에서 우린 소수자. 아시안이 많은 동네에 살아도 결국엔 나는 이방인. 사회적으로 교류가 없으니 집안에 갇힌 삶을 산다.
뒷마당에 그늘막 치고 엎드려 누워 있거나 차 마시며 책을 읽는다. 새소리, 바람소리를 듣는다. 긴장을 내려놓고 무턱대고 쉬는 시간. 이밖에 더 무엇을 하랴. 남편은 회사를 다니고 아이들은 학교를 다니니 그들만의 사회가 있지만 내겐 이곳 뒷마당이 전부. 이곳이 내 세상이다. 밖으로 확 트였으되 담으로 둘러쳐진 곳. 내 쉼터. 그래서 요즘처럼 해가 긴 때가 좋다. 심심하고 적적하지만, 말 없이 지내니 타인에게 잘못을 범하기 어렵다. 좋은 곳에 유배온 셈이다.
4월의 과제를 뒤늦게 마쳤으니 이제 책으로 돌아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