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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미남 Dec 29. 2022

『방구석 미술관』, 그림이 많은 책을 읽는 나만의 방법

  생애 첫 독서 모임 참석을 위한 독후감 제출까지 12일 남았다. 책은 조원재(2018) 작가의 『방구석 미술관』.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이 책을 통해 확실히 ‘미술’이라는 예술과 친해졌다. 아니, ‘독서’ 자체와 좀 더 친해졌다. 또 이렇게 그림이 많은 책을 어떻게 읽으면 좋을지에 대한 내 나름의 독서방식을 터득하게 된 것 같다.

‘예술은 리비도의 형상이다?’

  처음 이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 나는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마치 ‘소논문’을 쓰듯 각주까지 넣어가며 책을 해체하고, 분석하려고 했다. 내가 졸업한 두 개의 학과 중 ‘국어국문학과’ 재학 시절 버릇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었을까. 독후감 제목도 ‘예술은 리비도의 형상’과 같이 약간 거창하게 쓰려고 했다. 정신분석학자인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는 인간의 무의식에는 두 가지 충동(drive)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를 생의 충동(libido)이라 하고, 사랑의 충동(eros)과 죽음의 충동(thanatos)은 서로 대립하는 힘이지만 근본적으로는 하나의 ‘리비도’라는 주장이다.
  나는 일찍이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 매력을 느꼈었고, 인간을 움직이는 근원이 리비도이자 원초아라는 견해를 토대로 문학작품 또는 예술 전반을 분석했던 것 같다. 위 이론에 따르면 ‘에드바르트 뭉크’는 어머니와 누나의 ‘죽음’을 통해 죽음의 충동을 경험했고, 훗날 ‘라르센’이라는 한때 사랑했던 여자에게 살해당할 뻔하면서 사랑의 충동과 죽음의 충동의 공존, 즉 양가성을 <마라의 죽음>이라는 작품을 통해 표현했다고 볼 수 있다. ‘프리다 칼로’ 역시 교통사고(죽음의 충동)와 남편인 ‘디에고’의 불륜 경험(죽음+사랑의 충동)을 작품에 녹여냈고, ‘에드가 드가’의 <실내(강간)>이라는 작품에는 리비도의 양면성이 짙게 채색되어 있다. 압생트를 먹고 자신의 귀까지 잘라낸 ‘빈센트 반 고흐’의 자화상, 결국 아무리 의학이 발달해도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다는 ‘구스타프 클림트’의 <의학>이라는 작품에서는 죽음의 충동이 짙게 배어있다. 매독으로 아버지를 잃은 ‘에곤 실레’의 작품 대다수에는 생의 충동인 ‘리비도’를 쉽사리 발견할 수 있었다.
  위와 같은 패턴으로 나는 이 책을 계속 분석하고 있었고, 이를 토대로 ‘예술은 리비도의 형상이다’와 같은 결론을 내려고 했다. 하지만 책을 읽는 과정을 통해 내 생각은 점차 변하게 되었다. 책에 나온 예술가들을 ‘리비도’ 하나로 연결 짓는 것은 거의 억지에 가까웠다. 자연을 사랑했던 ‘폴 고갱’이라든지, 기존의 사상을 타파하고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구축하고자 했던 ‘에두아르 마네’라든지, 빛의 변화에 따라 하나의 풍경을 다채롭게 그려냈던 ‘클로드 모네’ 등을 만나면서 나의 이론은 특정 몇몇 화가들에게만 적용할 수 있음을 깨달았고, 내 인식의 한계와 오만을 느끼게 되었다. 정확히 222페이지까지 분석하듯 피곤하게 책을 읽은 후, 나는 이 책을 읽는 새로운 방법을 터득하게 되었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그림이 많은 책을 읽는 방법’

  ‘폴 세잔’의 작품부터는 우선 ‘소제목’과 ‘작품’ 위주로 책을 훑듯 넘기기 시작했다. 그제야 숨통이 트였고, 비로소 ‘방구석 미술관’에서 작품을 감상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림에 대한 구구절절한 설명 없이 그림을 멍하니 감상하기도 하고, 소제목을 보면서 어떤 마음에서 그림을 그렸을지 상상하기도 했다. 특별히 내 눈을 사로잡은 작품은 ‘마르크 샤갈’의 <에덴동산, 아담과 이브의 파라다이스>라는 작품이었다. 왠지 불안하게 만드는 시퍼런 배경 속에 화려하게 피어있는 꽃과 인물들의 불안정한 배치가 위험하고, 또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그림을 본 후 샤갈에 대한 설명을 읽어보았고, 그가 유대인이었다는 것과 이 작품이 ‘구약성경 삽화 작업’ 중 하나라는 사실도 새롭게 다가왔다. 중요한 건, 그 이상 이 사람에 대해 알고 싶진 않았다는 점이다.
  작가는 분명한 의도와 본인만의 취향으로 이 책을 구성했을 것이다. 작가가 좋아하는 예술가 위주로 차례를 구성했을 것이고, 독자로서 그 흐름을 반드시 따라갈 의무는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살바도르 달리’를 좋아하는데, 이 책에는 수록되지 않아서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따라서 다음에는 ‘살바도르 달리’와 관련된 책을 찾아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으로 사고가 확장되었다.
  내가 이 책을 통해 터득한 방법을 정리해보자면, 그림이 많은 책을 읽을 땐 우선 편하게 그림부터 훑어본다. 내 마음을 사로잡는 그림을 발견한다. 그 그림과 관련된 글 또는 설명을 읽는다. 그 작가에 대해 더 알아보고 싶어진다. 검색을 통해 다른 작품을 찾아보거나 연관된 도서를 찾는다. 사고를 확장한다. 이 방법으로 『방구석 미술관』을 다시 읽는다면 한결 부담을 내려놓고 읽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모든 책을 다 분석하듯 읽을 필요도 없고, 독서를 통해 자신만의 즐거움을 찾아낼 수 있다면, 그리고 그것을 현학적인 단어나 문장으로 비평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난다면, 내 여생의 독서는 앞으로 더 가볍고 다채로워질 것 같다. 책을 읽는 행위 자체에서 즐거움을 느낄 수도 있다는 것을 오랜만에 일깨워준 고마운 시간이었다.



※ 참고문헌

강영계(2008), 『철학의 끌림』, 멘토
조원재(2018), 『방구석 미술관』, ㈜백도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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