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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미남 Aug 07. 2023

#005화 @진지 공사와 우유 귀신

  이번에는 잠시 쉬어가는 시간을 가지고자 한다. 너무 우울한 이야기만 계속 쓰면 나 역시 지치지 않겠는가. 나는 군쪽이로 찍힌 후 진지 공사에 참여하게 되었다. 진지 공사란 무엇인가. 이것은 군인들의 연례 행사라고 할 수 있다. 비바람을 맞으며 깎이고 노후화된 진지와 참호들을 봄가을에 유지보수 또는 개·중축하는 공사를 말한다. 공사 현장에서 무거운 모래 마대를 끝도 없이 나르고, 곡괭이로 땅을 파고, 삽질로 모래를 퍼다 나르고, 경사를 맞추는 행위(군대 은어로 ‘나라시를 깐다’라고 한다.)를 하다 보면 내가 공사장 인부인지 군인인지 헷갈리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     


  우리 부대는 출장을 나가듯 타 부대시설로 짐을 싸고 옮겨서 약 일주일 정도 공사를 하고 다시 본래 부대로 돌아와 주말을 보냈다. 그리고 평일 일과가 시작되면 또 진지 근처로 이동해서 공사를 하고. 이렇게 2주 정도 공사를 했던 걸로 기억한다. 공사 당시 우리가 지내던 부대의 시설이 그리 쾌적하지는 않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이때 선임들의 짜증 지수도 상당히 올라갔던 것 같다. 나는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고 늘 의식하고 있었다.     


  공사 일정은 심플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밥을 먹고 진지로 가서 공사를 진행하고, 일과가 끝나는 시간쯤 다시 주둔지로 복귀해서 저녁을 먹고 개인 정비를 하는 식이었다. 모래 먼지가 날리고, 분명 공사판으로 출발하는 아침에는 쌀쌀했는데 한참 일하다 보면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내가 공기를 마시고 있는 건지, 모래를 마시고 있는 건지 모를 지경이었다. 흐르는 땀과 모래가 뒤엉켜서 피부가 까끌까끌하게 느껴졌다.     


  공사 중 나를 가장 힘들게 만들었던 건 바로 ‘갈증’이었다. 수통 가득 채워갔던 물은 어느새 증발하고 없었다. 분명 뚜껑을 잘 닫아놓았는데도 말이다. 뭐 당연한 얘기지만, 물 도둑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이었다. 흡연하지 않았기에, 한 번씩 주어지는 휴식 시간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벌컥벌컥 물을 마시는 것뿐이었다. 이미 사회에서부터 갈증을 잘 느끼는 편이었기에, 다른 선임들에 비해 내 수통은 항상 빠르게 가벼워졌다.

     

  아직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일 때, 복귀를 한참은 앞두고 있을 시간이었다. 진지 공사에서 내가 가장 기다리던 이벤트, ‘간식 추진’ 시간이 찾아왔다. 매일 한 번씩 오후 시간이 되면 간식을 가득 실은 추진 차량이 공사장에 도착한다. 나를 비롯한 각 소대의 이등병들은 뛰어가서 간식을 타온다. 간식은 보통 개인당 빵 하나, ‘우유’ 하나. 물론 나는 빵을 좋아하는 편이었지만, 내 주된 관심사는 다름 아닌 우유에 있었다. 선임 중에는 우유를 마시면 속이 좋지 않다거나, 흰 우유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꼭 있었다. 내 주된 ‘고객층’은 바로 그런 부류의 선임이었다. 흰 우유가 나왔다고 불평을 한다거나 “야! 내 우유 먹을 사람?!”하고 외치는 선임들의 목소리가 들리면, 나는 가장 먼저 “이병 문*우!”를 외치고 뛰어가곤 했다. 그리고 우유를 받자마자 그 자리에서 바로 뜯어 한 번에 들이켰다. 흰 우유가 이렇게 맛있는 음료였던가. 한 팩, 두 팩 마시다 보면 어떤 날은 일곱 팩까지 마시기도 했다. 물론 간식을 먹을 수 있는 시간은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건빵 주머니에 넣어 뒀던 우유를 몰래 마시기 위해 화장실에 다녀오는 척 자리를 피해, 숨어서 마셨던 기억이 난다.     


  초등학생 시절을 떠올려 본다. 매일 아침 우유 당번이 우유를 가져오던 그 시절. 흰 우유를 받아 든 아이들 얼굴에는 그늘이 진다. 우유를 먹기 싫어했던 친구들이 그렇게나 많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냥 다시 우유 통에 반납하면 되었을 것을, 꼭 사물함이나 자기 가방, 또는 책상 서랍 속에 다들 우유를 숨겨두곤 했다. 그러곤 까먹는 것이 자연의 이치였다고나 할까. 정신을 차려보면 가방 속에서 터진 우유는 교과서와 가방을 눅눅하고 비릿하게 만들었고, 사물함에서 터진 우유들은 사물함을 열어보는 것에 대한 PTSD를 야무지게 만들어주곤 했다. 대다수가 흰 우유를 거부하던 그 시절, 난 우유를 못 먹는 짝꿍의 구원자였다. 이렇게 시원하고 맛있는 우유를, 다들 왜 싫어하는 걸까. 난 그들을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내심 그들의 우유를 대신 먹어줄 수 있어서 행복했다. 그때의 추억들이, 흙먼지가 휘날리는 진지 공사판에서 새록새록 떠올랐다.      


  작은 책상도 크게 느껴지던 그 아이가, 어느새 머리를 빡빡 민 군인 아저씨가 되다니.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컸던 내가, 살면서 처음으로 ‘문제아’로 낙인찍혀 눈치나 보고 있다니. 새삼 울컥한 마음이 고개를 들곤 했다. 그런 나에게 ‘흰 우유’는 말라비틀어진 마음의 갈증을 채워주던 고마운 음료였다. 불과 30분도 채 지나지 않아 우유 일곱 팩을 해치우던 우유 귀신. 그게 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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