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에서 화제가 되었던 <피지컬: 100>이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평소 ‘강한 몸’에 대한 동경과 열망이 있었기 때문에 재밌게 보고 있었는데, 오랜만에 군인 시절의 PTSD를 유발하는 장면이 나왔다. 바로 ‘모래 마대 나르기’. 출연자들은 팀 대항전으로 계단 아래의 모래를 마대에 담아, 12분 동안 어느 팀이 더 많이 옮기는지 대결했다. 군인 시절, 진지 공사 때 우리가 사용했던 ‘익숙한’ 모래 마대를 볼 수 있었다. 손에 닿았을 때 까끌까끌했던 재질까지 생생하게 떠올랐다. 출연자들은 야전삽이나 일반 삽도 없이 손으로 미친 듯이 모래를 쓸어 담았다. 어떤 힘 좋은 출연자들은 모래 마대를 양손에 하나씩 들고 뛰어다니기도 했다. 놀라운 광경이었다. 역시 ‘피지컬’이 중요하긴 한 것 같다.
진지 공사 때도 지겹게 모래 마대를 날랐지만, 정작 문제가 되었던 사건은 그 이후에 발생했다. 부대 내 나의 평판은 좋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나는 늘 열심히 하려고 했고, 그러면서도 실수 연발이었다. 긴장으로 몸에 잔뜩 힘이 들어간 탓에, 사소한 작업에서도 실수를 연발했고, 그럴 때마다 선임들의 욕설을 들어야만 했다. 잘해서 칭찬을 듣는 날보다, 실수로 혼이 나는 일상의 연속. 나이도 얼마 차이 나지 않는 놈들에게 무시당하고, ‘죄송합니다’를 연발해야 하는 생활에 나는 점점 지쳐갔고, 주눅이 들어갔다. 정신을 차려보니 72kg이었던 몸무게는 어느새 62kg까지 줄어 있었다. 극도의 스트레스가 본의 아니게 다이어트에 도움이 되었다고나 할까. 어쨌든 건강한 방법으로 빠진 게 아니었기 때문에, 지금 생각해보면 지방뿐만 아니라 그나마 있던 근육까지 다 빠졌던 것 같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있던 부대 내에서 공사 비슷한 것을 ‘또’ 했던 것 같다. 정말 군 생활은 공사와 작업의 연속이었던 것 같다. 그때 문제가 되었던 ‘시멘트 마대’를 날라야 하는 일이 생겼다. 밑에서부터 마대를 어깨에 이고, 꽤 높은 계단을 오르내려야만 했다. 선임들은 물론이고, 내 밑으로 새로 들어온 몇 안 되는 후임들까지 거뜬하게 마대를 날랐다. 그러나 당시 뼈밖에 남지 않았던 나에게 10kg 또는 20kg의 시멘트 마대는 천근만근이었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마대를 날랐지만, 도무지 속도를 내지 못하는 나에게 또 선임들은 경멸의 눈빛을 보냈다. 당시 ‘체력만’ 좋았던 이○환 일병은 나에게 이렇게 핀잔을 줬다. “야, 네 밑으로 애들 봐라. 다 너보다 잘 나르는데, 넌 뭐하냐? 빨리빨리 안 나르냐? 너만 힘드냐?” 나는 분명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힘이 없는 것도 서러운데 욕까지 먹으니 정신적으로 더욱 힘들고 점점 지쳐갔다.
땀이 비 오듯 흘렀다. 눈앞이 흐려졌다. 나를 무시하는 선임들에게 뭔가 보여주고 싶었다. 후임들에게 한심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런 나의 마음과는 반대로, 마대를 나르던 몸이 어느 순간 기우뚱하고 기울었다. 털썩. 시멘트 마대를 나르던 내가 쓰러진 것이다. 바닥에 떨어진 마대는 터져서 시멘트가 줄줄 새어 나오고 있었다. 나는 재빨리 일어나서 그 마대를 양손으로라도 잡아 올리려고 했다. 한심한 모습을 모두에게 보이고 말았다. 귀가 빨개졌다. 그때 일 잘하기로 소문난 부대 내 실세 박○길 상병이 나한테 다가왔다. “가지가지 한다. 야, 너 저기 가서 쉬어. 그늘에서 쉬어.”
선임들이 모두 일하고 있는데 쉬라니. 그럼 내가 얼마나 더 미움을 받을지 깊게 생각해 볼 필요도 없었다.
“아닙니다. 할 수 있습니다.” 나는 땀을 비 오듯 흘리며 항변했다.
“씨* 쉬라고! 내가 쉬라고 하면 쉬어.” 지금 생각해보면 그의 마음이 어땠을지 조금은 상상이 간다. 선임으로서 후임을 걱정하는 마음, 하다 하다 마대를 나르다가 쓰러진 ‘한심한’ 후임 놈한테 더 이상 일을 시키고 싶지 않은 마음이 공존하지 않았을까. 군인으로서 선임의 말은 따라야 했기에, 나는 빈손으로 아래로 내려가 그늘에 앉아 쉬고 있었다. 패배자의 기분이었다. 소대 내 선 후임들은 여전히 마대를 나르고 있었다. 몇몇 선임들이 나한테 다가와서 물어봤다.
“야, 넌 뭔데 쉬고 있냐?”
“야, 너 누가 쉬라고 했냐.”
“야, 혼자 쉬니까 참 편하고 좋다?”
이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나는 반복적으로 관등성명을 대며, “박○길 상병님이 잠깐 쉬라고 하셨습니다.”라고 나오지도 않는 목소리를 쥐어 짜내서 해명했다. 죄인이 된 것 같았다. 아니, 작업을 하는 동안 아픈 것도 ‘죄’라는 것을 그때 알게 되었다. 모래 마대의 무게, 시멘트 마대의 무게에서 삶의 무게가 느껴졌다. 내 어깨를 짓누르던 무게, 앞으로 남아 있는 까마득한 군 생활에 대한 중압감이었다.
이날 이후 나는 ‘마대를 나르다가 쓰러진 폐급’이라는 오명 하나를 더 얻게 되었다. 새로운 타이틀이 늘어날 때마다, 점점 더 부대 내 ‘군쪽이’로 이미지가 굳어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