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밤에 또 눈이 내렸다. 뽀드득뽀드득. 평소 같았으면 듣기 싫었을 소리. 출근길 눈길을 밟아가며 아주 오랜만에 이 소리를 오롯이 감상할 수 있었다. 오늘이 나에게 허락된 마지막 하루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오늘의 나는 오늘 하루만의 나다. 오늘이라는 이날에 후회를 남기고 싶지 않았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나를 울컥하게 만든 문장이었다. ‘선행성 기억상실증’을 앓고 있는 주인공 ‘히노 마오리’의 독백이다. 만약 오늘 있었던 모든 기억을 내일 아침 눈떴을 때 삭제당한다면, 나는 오늘 하루를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오늘’이라는 유일한 하루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까. ‘기억상실’이라는 꽤 진부한 주제를 이 소설의 주인공들은 청춘 속에서 풋풋하게, 예쁘게, 그러나 진지하게 녹여낸다. 이들의 시점을 따라 글을 읽다 보니 어느새 눈시울이 붉어지는 내가 있었다. 나도 아직 청춘인가보다. 주인공 ‘가미야 도루’는 기억상실을 앓고 있는 여자친구 히노에게 이렇게 말한다.
“내일의 히노도 내가 즐겁게 해줄게.”
매일 눈을 뜨면 어제의 내가 사라져버리는 불안 속에서 살아가는 히노 입장에서 이 말은 어떤 울림이 있었을까. 오늘의 나를 기억하지 못할 내일의 내 여자친구에게, 이 말을 건넨 가미야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사랑’이라는 감정은 ‘서술기억’에 저장되는 걸까, 아니면 ‘절차기억’에 저장되는 걸까. 생각해보면 내가 누군가를 열렬하게 사랑했을 때의 감정은, 도저히 ‘언어’로 서술이 안 된다. 그 시절의 내가 있었고, 그 시절의 그 사람이 있었을 뿐. 그때를 떠올리면 아직도 가슴이 찌르르하지만, 그렇다고 여전히 그 사람을 사랑하지는 않는다. 이토록 모호한 감정, 이 감정만으로 두 개의 소우주가 만나 세상 가장 가까운 하나의 우주를 구축하는 것, 사랑. 이 얼마나 기적 같은 일인지. 진부한 주제를 진부하지 않게 풀어낸 이 작품을 읽고, 나는 진부한 상념에 잠겼다. 오늘이 나에게 허락된 마지막 하루라면, 나는 오늘 하루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오늘이 마지막인 이유가 ‘죽음’ 때문이든, 오늘의 나를 내일의 내가 기억하지 못하게 되는 ‘기억상실’ 때문이든, ‘오늘’ 그리고 ‘이 순간’보다 소중한 건 그 어디에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자신한테 가장 솔직하고 나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내 일상의 모든 숨결을 아낌없이 듬뿍 마시며 오늘을 살아볼 테다.
※ 참고문헌
이치조 미사키(2021), 권영주(역), 『오늘 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바이포엠 스튜디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