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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rim jari May 12. 2021

글-맛:명랑한 은둔자(캐럴라인 냅)

(주)바다출판사/ 2020.09.04

글-맛: 글이 가지는 독특한 운치나 글을 읽으면서 느끼는 재미



친구가 책을 보내줬다. 

표지가 이뻐서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던 명랑한 은둔자. 책의 저자인 냅은 제목처럼 철저한 은둔자지만, 명랑함을 품은 작가 같다. 그녀의 짙은 고독과 고립에 대한 고찰과 삶의 태도가 보이는 책이다. 


내가 마이클 때문에 고심하는 것, 양가감정과 불만족을 만성적으로 앓는 것을 보면 그 꿈에 단점이 있다는 사실, 그런 식의 갈망에 단점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p78


슬며시 굳어진 관념과 이론들이 속에서 빠득거릴 때가 있다. 내 느낌보단 사회 기준이 가슴을 채울 때, 상황이나 타인에 대해 맞고 틀리고를 수없이 가늠한다. 아무리 자문해도 정리되지 않는 의문들은, 질문 자체를 바꿔야겠지만 갈망 자체의 한계를 인정하기까지 시간이 많이 쓰인다. 



솔직히 우리는 미래를 그릴 때 자신이 어떨지 상상하는데 익숙하지, 남들을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까 상상하는 데는 익숙하지 않다.
-p121


남을 위해 시간을 투자하고 하루를 보내는 걸 넘어 세월을 보내는 이들을 보면, 그 간절함의 정도가 늘 의아했다. 내 미래도 제대로 상상하기 힘든데, 더군다나 남을 위해서라니. 

달리 생각해 보면 내가 불분명하니 남이라도 똑바로 서게 해 주고픈 심정일 수도 있나. 싶지만, 여전히 남의 자리를 완전히 내주기란 쉽지 않다.





어떤 중독이든, 어느 시점이 되면 당신이 감정을 통제하기 위해서 행동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 행동이 당신을 통제하게 된다. 나는 혼자 먹기 시작했고, 특정한 음식들만 먹기 시작했고, 그다음에는 그렇게 먹는 시간을 기대하기 시작했고, 그다음에는 그 시간을 더 중요하게 만들기 위해서 정교한 의식을 지어내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어느 시점엔가 나는 선을 넘었고, 그다음에는 되돌릴 수 없었다.
-p163


스스로를 위한 규칙이 한 끗 차이로 선을 넘으면, 족쇄처럼 발목을 잡는다. 정리와 질서에서 안정을 느끼는 나도 자주 범하는 오류다.  삶을 이롭게 만드는 리듬이 아니라, 안 하면 불안을 부르는 통제로 이어진다. 알아채고 멈추는 게 중요하다. 반복하지 않는 것이 리듬을 끊는 시작일 수 있다.



이럴 때 운동이 실제로 도움이 될 수도 있다. 좀 더 활기찬 모드로 전환하는 방법, 무기력함과 그렇게 무기력한 자신이 나태하다는 기분에서 벗어나는 방법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날 아침처럼 운동이 과거의 운동으로 돌아가는 경우도 있다. 운동이 나 자신을 벌주는 방법, 말 그대로 나 자신을 때려눕히는 방법이 되는 것이다. 그런 것은 운동이 아니다, 그것은 자기혐오 활동이다. 그리고 내가 지겨운 것은 바로 이런 형태의 운동이다.
-p312


자기혐오 활동이라는 글을 보자마자, 언젠가 느꼈던 지독한 기분이 이거였구나 싶었다. 순간 어찌나 명쾌해지던지. 

코로나가 선사한 무능력한 기분에서 벗어나려 했던 갖가지 행동들이 떠오른다. 어째서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는가, 답답함이 자기혐오로 가는 속도는 순식간이었다.  


작가는 이제 세상에 없지만, 왠지 그녀의 은둔스러운 집에서 명랑한 표정으로 글을 쓰는 냅이 있을 것 같다. 외국 여성이 느낀 감정은 웬만큼 공감하기 어려울 것 같았는데, 일상에서 반복되는 비탄스러운 상황을 공유하며 웃고 떠드는 친구처럼 가깝게 느껴지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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