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문예출판사 / 2018. 07.05
글-맛: 글이 가지는 독특한 운치나 글을 읽으면서 느끼는 재미
'19호실로 가다'라는 표지에 시선이 확 뺏기는 책이었다. 교보문고 팟캐스트에서 듣고 대여했는데, 석양을 멍하니 보는 한 여자의 뒷모습이 어딘가 내 모습 같기도 하고 생경하지 않아서였을까.
핸드폰에 있는 무의도 노을 사진도 함께 떠올랐다.
두 사람의 삶은 자기 꼬리를 문 뱀과 같았다. 매슈는 수전, 아이들, 집, 정원을 위해 일했다. 이 쉼터를 유지하려면 보수가 좋은 일자리가 필요했다. 수전은 매슈, 아이들, 집, 정원을 위해 실용적인 지혜를 발휘했다. 그녀가 없었다면, 이 모든 것이 일주일 만에 무너져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두 사람이 "다른 것은 모두 이것을 위해서"라고 말할 만한 것이 없었다. 아이들은 생활의 중심이자 존재의 이유를 될 수 없었다.
-p280
그렇다면 수전은 왜 인생이 사막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끼는가?(이런 기분이 한 번에 몇 초 이상 지속되지 않는 것이 다행이었다.) 왜 중요한 것은 하나도 없고, 아이들도 자신의 것이 아닌 듯한 기분을 느끼는가? 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에도 그녀의 지성은 계속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p286
부부는 지성에 문제가 없는 성인이지만, 점점 존재의 이유를 잃어간다. 수전은 가정을, 남편은 돈을 벌기 위해 자기 꼬리를 물고 뱅뱅 돌 수밖에 없다. 건강하고 돈에 여유가 있어도 자식은 인생의 목표가 될 수 없기에 수전은 존재의 이유를 갈망한다. 혹은 지성에 문제가 없다는 결론이 문제였을지도. 모든 걸 갖춰도 인생은 사막이라는 걸 아는 것이 진정한 지성일 지도 모르니까.
그녀는 지금 상태가 무엇이든, 그 상태는 가족들과 함께 느끼는 진정한 행복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수전은 자신이 비이성적인 사람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견디며 사는 수밖에 없었다. 어떤 사람들이 불구가 된 팔, 말 더듬는 버릇, 청력 장애 등을 견디며 사는 것처럼. 수전도 스스로 인정할 수 없는 자신의 심리상태를 인정하고 견디며 살아가야 했다.
-p299
인간은 누구나 공평하게 창조적인 능력을 갖고 있다고 본다.
어떻게 표현하고, 얼마큼 창조성을 발견하느냐에 따라 삶의 결이 달라지지 않을까. 꼭 예술을 하고 발명을 하는 게 창조는 아닐 것이다. 수전의 암흑기에 주변의 누구라도 그녀의 창조성을 발견하고 자극했다면, 그녀의 끊임없는 자책이 조금이라도 멈췄을지 모른다. 내면의 혼란스러움을 인정할 수 없는 심리상태야말로, 벼랑 끝에 내몰린 모습과 뭐가 다를까.
초록색 새틴 이불 위에 똑바로 누워 있다 보니 다리가 싸늘해졌다. 그녀는 일어나서 서랍장 맨 아래 칸에서 개켜져 있는 담요를 찾아내 꼼꼼히 다리를 덮었다. 그렇게 누워서 가스가 작게 쉭쉭 거리며 방 안으로, 그녀의 허파 안으로, 뇌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소리를 듣고 있자니 꽤나 만족스러웠다. 그녀는 어두운 강물로 떠갔다.
-p335
수전은 매일 호화로운 집을 떠나 외각의 허름한 호텔 19호실로 간다. 집에 독립적인 내 방을 만들어도 어쨌든 가족과 분리될 수 없는 결국엔 집이다. 자식과 남편에게 벗어나고 싶은 감정은 죄책감으로 수전을 옥죄고, 결국 19호실로 향하게 만들지만 진정한 해방은 죽음으로 귀결된다.
모든 게 안타깝다, 가능하다면 그녀를 데리고 이곳저곳을 보여주고 싶고 시원한 바닷바람 한번 쐬어주고 싶다. 각자의 인생 걸림돌은 스스로 치워야 하니, 도와줄 건 함께 있어주는 것뿐이지 않을까. 수전의 외롭고도 고독스러운 심정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또 결혼은 <남자와 남자 사이>의 페기가 보여주듯이 여성을 안주하게 하고 결혼 전의 매력을 잃게 한다. 그뿐만 아니라 <19호실로 가다>의 수전처럼 자신의 일도 버린 채 가정을 가꾸고 아이들의 교육에 온 힘을 쏟다 보면, 여성은 어느새 자신의 정체성까지 잃게 된다. 직장을 그만두는 희생을 감수하며 완벽한 가정을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한 결과는 남편에 대한 경제적 의존뿐이다.
-p340
이 책은 여러 가지 챕터가 있는 단편소설집이다. 맨 마지막에 '19호실로 가다'가 있는데, 역시 제일 재밌다. 앞쪽 소설들은 단편이다 보니 축약된 내용을 다 이해하기가 어려웠는데, 19호실로 가다는 내용이 충분하고 이야기 흐름도 자연스러워 괜찮았다.
2018년 출판 이후 4년이 지난 지금도 공감되는 내용이 많다.
누구에게나 다 추천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