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7.27 / (주)문학동네
글-맛: 글이 가지는 독특한 운치나 글을 읽으면서 느끼는 재미
친구에게 선물한 책이 다시 내게로 왔다. 읽는 내내 눈물 났다 해서 어떤 내용일지 궁금했다. 제목은 너무 밝은 밤인데 말이지.
지연 씨 사정은 나도 들어서 알고 있어요. 내 사정을 들어서 안다니 그게 무슨 말일까. 나의 실수가 사생활 때문일 거라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으며 그 생각을 어떻게 내게 전할 수 있을까. 아니야. 그런 이야기를 듣도록 빌미를 제공한 나의 실수가 문제인 거야.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을 저지르다니. 에어컨의 차가운 바람에 몸이 떨렸다. 나는 정신을 차려야 했다. 흠 잡힐 일이 없도록 어느 때보다도 더 노력해야 했다.
-p174
나의 경우, 정서가 건강하지 못함을 증명하는 반응이 자책이었다. 내 시선이 삐뚤어져서, 내 생각이 한없이 좁아서, 나는 원래 운이 없으니까 실수를 하고 일이 잘못된 거라 비난했다. 더 정신 차리고 애써야 한다고 자신을 꾸짖는 건 큰 도움이 되지 않더라. 오히려 그때를 기점으로 애씀을 놔버려야 하는 걸 30대가 훌쩍 넘어서야 알게 됐다. 내가 삐뚤어졌거나, 좁거나, 운이 없어도 상관 없어질 때야말로 해방감을 느꼈다. 나의 인생을 내가 평가하지 않는 것. 오히려 그것이 인생에 도움이 될 때가 많다.
할머니는 희자야,라고 말하지도 못한 채로 자리에 주저앉아서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울음을 터뜨렸다. 반가움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동안 입 밖으로 내지 않았지만 하루에도 몇 번씩이고 치받치던 두려움이 그제야 몸 밖으로 빠져나왔기 때문이다. 두려움이란 신기한 감정이었다. 사라지는 순간 가장 강렬하게 느껴지니까.
-p179
명숙 할머니가 보내오는 편지에도 할머니는 답을 하지 않았다. 편지에서 묻어 나오는 명숙 할머니의 애정이 할머니는 버거웠다. 명숙 할머니의 편지를 읽다 보면 결국 자신이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됐으니까. 그것도 아주 간절하고 절실하게, 사랑받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됐으니까. 남선의 모진 말들은 얼마든지 견딜 수가 있었다. 하지만 명숙 할머니의 편지는 읽으면 늘 마음이 아팠다. 사랑은 할머니를 울게 했다. 모욕이나 상처조차도 건드리지 못한 마음을 건드렸다.
-p220
관계에서 생기는 모든 감정은, 결국 서로에게 공평하게 전달되는 것 같다. 그 사랑은 견고해졌다가 사라질 것 같기도 하지만 한번 느낀 감정이 쉽게 잊히긴 어렵다. 책의 주인공 모두의 관계에서 그 흔들리지 않는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나도 그에게 죽어버리라고 말했다. 전에는 입에 담지 못했던 온갖 폭력적인 말을 하면서 나는 그 말에 내가 얻어맞은 기분을 느꼈다. 그는 내 말에 상처받거나 가책을 느끼지 않았으니까. 내가 뱉은 말은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않는 그의 매끈한 표면에서 튕겨 나와 나를 쳤다.
-p252
타인을 상처 주는 말이 내 입에서 나와 다시 내 귀로 흡수된다면 두 배로 억울할 일이다. 어디선가 화내는 사람이 결국 진 거라는 소리를 들었고, 당시엔 승부를 떠나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참는 것이 어려운 게 문제지.. 싶었는데- 시간 지나 보니 화도 잘 내는 기술이 따로 있었다. 그것도 내 감정이 소화가 된 후라야 가능하니, 일단 생각을 멈추고 시간을 갖다 보면 치밀어 오르던 화가 마음을 통과하더라.
다른 사람들과 다르지 않은 삶, 두드러지지 않는 삶, 눈에 띄지 않는 삶, 그래서 어떤 이야깃거리도 되지 않고, 평가나 단죄를 받지 않고 따돌림을 당하지 않아도 되는 삶. 그 동그라미가 아무리 좁고 괴롭더라도 그곳에서 벗어나서는 안 된다는 것이 엄마의 믿음이었는지도 모르겠다고, 나는 잠든 엄마의 숨소리를 들으며 생각했다.
-p271
평범하게 사는 게 제일 어렵다는 말, 그 뜻을 정확하게 설명하는 문장이다. 자신만의 독특함을 지키며 살아가라면서 다수의 보편적인 굴레를 벗어나면 평가와 비난을 퍼붓는 게 사회다. 그 동그라미가 아무리 넓어져도, 형태가 없어지지 않는 한 경계는 존재할 것 같다.
책을 읽으면서 이렇게나 울 수 있을까 싶을 만큼 티슈를 많이 썼다. 주인공 각자에게 공감되고 다양한 감정이 고스란히 전달된다. 새로운 깨달음을 주거나, 몰랐던 지식을 알려주진 않는데- 깊이 내재된 감성을 건드린달까. 그게 최은영 작가의 힘이구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