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3.25/1984 Books
글-맛: 글이 가지는 독특한 운치나 글을 읽으면서 느끼는 재미
이웃 블로그 책 리뷰에서 만난 책.
제목은 앙증맞은데 내용은 마치 깊은 바다 같았다.
이럴 때 꼭 끌린단 말이지.ㅎ
당신이 머릿속에 그리는 건 전혀 사실이 아니거나 역사적인 진실, 있는 그대로의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건 이런 진실이 아니다. 객관적인 눈으로 차분히 행하는 독서가 완벽한 독서는 아니다. 그런 독서가 핵심에 이르는 독서는 아니다. 그런 독서는 책의 검은 광맥을 건드리지 못한다. 책에 담겨 있고 당신의 눈과 삶의 저변에 존재하는, 있는 그대로의 반짝이는 진실의 핵을 건드리지 못한다. 당신의 눈 속, 삶의 저변. 즉 근원에 가닿는 또 다른 독서만이 당신의 마음을 끌어당긴다. 당신 안에 자리한 책의 뿌리로 직접 하는 독서, 하나의 문장이 삶 속 깊은 곳을 공략하는 독서.
-p48
우리는 사랑을 하듯 책을 읽는다. 사랑에 빠지듯 책 속으로 들어간다. 희망을 품고, 조바심을 낸다. 단 하나의 몸 안에서 수면을 찾고, 단 하나의 문장 속에서 침묵에 가닿겠다는, 그런 욕구의 부추김을 받으며, 그런 욕구의 물리칠 수 없는 과오를 저지른다.
-p108
책과 독서에 관한 작가의 통찰은 섬세하고 날카로웠다.
객관적인 눈은 평가에 집중돼 있으니 진실의 핵을 건드릴 리가 없고, 책의 어느 문장이 삶의 침묵을 가져다주길 바라는 나의 욕구도 빤히 읽은 것 마냥 '과오'라고 돼있으니... 풉.
유년기를 벗어난 우리는 몇 발 떼다 곧 멈춰 선다. 모래 위로 나온 물고기 같다. 성년이 된 우리는 죽음 속을 제자리걸음 하는 사람 같다. 우린 기다린다. 기다림이 스스로 굴할 때까지. 기다리거나 잠을 자거나 죽는 것이 매한가지일 때까지, 우린 기다린다. 사랑은 이 지점에서 시작된다. 사막을 배경으로 처음엔 보이지 않고 그 얼굴도 알아보기 힘들다. 처음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저 나아가는 모습이 보일 뿐이다. 사랑은 자신을 향해, 스스로의 완성을 향해 나아간다.
-p120
죽음을 기다리며 자신을 사랑하는 것..
그것을 향해 나아가는 게 삶-
외부의 소음과 사건들에 정신이 붙들려 있는 상태라면 발을 들이기가 쉽지만은 않은 책. 멈춰 서서 매 문장의 숨결과 향기, 떨림에 몸을 맡겨야 하는, 잦은 숨 고르기가 필요한 책이다.
-p129
그러나 그림 같기도, 아름다운 풍경 같기도 한 그의 글이 결코 마음의 진정과 휴식을 허락하지 않는 건 왜일까? 보뱅은 우리의 의견이나 확신을 끊임없이 뒤흔들어놓으며, 어느 문장에 이르러서는 독자를 혼란에 빠트리곤 한다. 그의 말들은 우리를 불러 세우며 우리에게 호소해 올 뿐, 무슨 대답을 주지 않는다. 작은 비눗방울처럼 가볍고 영롱한 터치의 글이건만 그리 읽기 편하지만은 않은 건, 난폭하다고는 할 수 없는 어떤 요청이 감지되기 때문이 아닐까?
-p132
위의 서술처럼 이 책은 조용할 때 멈춰 서서 읽어야 하는 책이다.
잠깐만 집중이 흐트러지면 내가 책을 읽는 건지, 글자만 읽는 건지 흘러가기 일쑤다. 보뱅의 요청은 아마도 자신의 말을 듣고 각자의 답을 찾기를 바란 게 아니었을까-
오랜만에 묵직한 분위기의 책을 읽은 듯.
아, 버지지니아울프의 냄새도 약간 난다.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