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9.20 / (주)한겨레엔
글-맛: 글이 가지는 독특한 운치나 글을 읽으면서 느끼는 재미
최진영 작가의 신간이 나왔다.
한번 펼치면 못 덮을 것 같아서 고이고이 만져보다 펼쳤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다는 건 신에게 구걸할 일이 늘어난다는 것, 목화는 아무도 사랑하고 싶지 않았다.
-p125
사랑하면 행복해지고, 그렇게 세상의 따뜻함을 한번 경험하면 인간은 고새 욕심이 생긴다.
신에게 계속 봄바람만 불게 해달라고- 아이처럼 때 쓰곤 한다.
정원에게 목화는 자기를 반영하는 거대한 감정 덩어리였다. 가장 사랑하면서도 가장 하찮게 여기는 존재. 믿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자 무심한 말 한마디의 진의를 의심하는 상대. 그 간극을 만드는 사람은 목화가 아니었다. 한정원의 상황이었다.
-p134
어떤 사랑은 끝난 뒤에야 사랑이 아니었음을 안다.
어떤 사랑은 끝이 없어서 사랑이란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어떤 사랑은 너무 멀리 있어 끝이 없다.
어떤 사랑은 너무 가까이 있어 시작이 없다.
-p155
바람은 바다는 땅은 나무는 한없이 그 자리 그대로 처음의 사랑을 지키건만-
사람의 사랑은 어째서 결국 하찮게 돼버릴까.
시작도 끝도 분명 사랑이었는데, 왜 상황을 이기지 못하는지.
인간만이 목적이나 의미를 생각하고 덫에 걸린다. 굴레에 갇힌다. 고통을 느끼고 죄책감에 빠지며 괴로워한다. 자주 저항한 만큼 이 일에서 간절하게 벗어나고 싶었던 미수가 뒤늦게 깨달은 방법은 아직 하나뿐이다.
나이 드는 것.
-p180
나이가 들수록 덫을 그대로 바라볼 수 있을 것 같다.
풀려고 애쓰거나, 의미를 파헤치는 힘을 쏟기보다 그 모양 그대로를 그저 바라보게 되겠지.
그렇게 삶이라는 바람에 파도에 힘을 빼고 내맡길 수 있겠지.
신목수. 우리가 하는 일이 그거야. 한 사람이 살 때 다른 사람은 죽어. 신이 우리에게 기회를 줬다고? 그럼 그때 죽은 다른 사람들은? 신이 자기를 보살핀다는 생각만큼 순진하고 이기적인 건 없어. 산 사람이나 삶을 축복이라고 여기는 거야. 신의 옹졸한 차별을 은총이라 부르면서.
-p184
목화는 자기를 둘러싼 나무에게 호소하듯 말했다. 숲 속의 날개 달린 것들에게, 흙이 되어가는 죽은 것들에게, 가장 먼 곳까지 이동하는 바람에게 애원하듯 말했다. 당신들이 모두 연결되어 있음을 알아. 가서 그 나무에게 전해. 당신의 일을 대신하는 나에게 예의를 갖추라고. 나를 도구로만 쓰지 말라고. 나 또한 한 번뿐인 삶을 사는 단 한 명임을 기억하라고.
-p195
목화는 다르다.
그의 엄마, 외할머니가 행하는 소환에 대한 태도와 확연히 다르다.
달라야 하지 않겠냐고, 작가가 권유하는 것 같기도 했다.
책을 읽으며 계속 생각했다.
작가가 말하는 소환과 죽음, 그리고 신은 무엇인지.
여전히 딥한 소재의 글인데도, 이전의 책에선 느낄 수 없던 미묘한 따뜻한 느낌은 왜인지. 목화의 소환으로 살아가고 있는 '단 한 사람'의 이야기라 그랬을까.
하지만 한 번뿐인 인생. 그것 없는 삶은 내 것이 아니다. 모두 자기만의 삶을 산다. 상대의 삶이 어떤지는 알 수 없다. 그런데도 다들 너무 쉽게 판단하지. 불행할 거라고, 행복할 거라고, 부족한 게 뭐냐고, 부족한 것 투성이라고.
-p197
언젠가 지인이 누군가를 거론하며 '불쌍하다'라는 표현을 썼다.
순간 내가 확 불편해지면서도 왜 그런지 이유가 안 잡혔는데- 그 판단이 불합리하다고 느낀 거였구나.
정작 아는 건 하나도 없으면서, 불쌍하다고 해버리는 건... 기어이 살겠다고 올라온 새싹 하나를 주저 없이 밟아버리는 느낌이랄까.
내 동생이 그 사람을 구하는 게 아니고 자기가 자기를 구한다는 뜻이지. 누가 대신 살아주는 거 아니잖아. 암흑이든 미로든 스스로 통과하는 수밖에 없어. 믿지 않는 사람들한테는 아무 소용이 없대. 아주 고집스럽게 자기 불행만 들여다보는 사람들한테는 신점도 사주 풀이도 기도도 무용지물이지. 듣고 싶은 말만 들으려고 하니까. 그들한테는 자기 불행이 노다지인 거야. 누구한테도 뺏기기 싫은 굉장한 보석인 거지. 왜냐면 내 불행만이 나를 위로하니까. 알아주니까. 가장 가까이서 나를 지켜주니까.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뭐냐면, 사람을 구하는 것에 꼭 목숨을 구한다는 의미만 있는 건 아닌 듯하다는 거야.
-p304
나는 지금 매우 불행하니까 힘들어요, 그러니 계속해서 나를 지지하고 지켜주고 위로해 주세요-
아이러니하다.
불행이 굉장한 보석 일수 있다는 것.
작가가 말하는 불행한 상황, 죽음, 사람을 구한다는 것에 대한 생각이 위문장에 다 표현된 것 같다.
책을 쓰는 데 오래 걸렸다는 글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내가 감히 판단할 수 없지만,
글이 깊고 따뜻해졌다. 슬프지만 빛이 느껴진다. 아픈데 웃어진다.
그렇게 위로가 됐던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