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글ㅡ맛

글-맛:겨울방학(최진영)

2019.10.25 / (주)민음사

by grim jari
글-맛: 글이 가지는 독특한 운치나 글을 읽으면서 느끼는 재미



왠지 연말 겨울쯤 어울리는 제목이다.

학교를 마지막으로 졸업한 날은 이제 기억도 안 나지만, 내겐 아직 겨울방학이 있다.

초등학교가 방학을 하면 방과 후수업이 오전으로 당겨지고, 어느 학교는 문을 닫는 곳도 있으니

아직까지도 겨울방학은 괜스레 기다려지는 기간. 여유로운 방학을 누리듯 천천히 읽어보려고 첫 표지를 넘겼다.



내게 글쓰기는 매일 밤 마시는 따뜻한 우유 한 잔 같은 습관이었다. 우유를 꼬박꼬박 잘 마신다고 상을 받거나 칭찬을 듣는 건 아니니까. 그래서 글은 나를 외롭게 했다. 조금 다른 의미로 그림은 우현을 외롭게 했을 것이다.
-p81


이 글을 읽으니 문득, 사람은 혹시 습관에 위로를 받기도 하나? 싶더라.

매일 밤 마시는 따뜻한 우유 한 잔은 하루의 마무리를 포근하게 안심시킨다. 글쓰기와 그림을 그리는 행위를 주기적으로 하면 간혹 어떤 감정이 정리되거나 생각이 명료해진다. 그러니 반복하게 되고, 습관이 된다.

여기까지가 딱 좋은데, 상과 칭찬을 받기 시작하면- 습관이 금세 일로 바뀌어버리겠지.


나는 금방 사랑하고 말 잘 듣다가 결국에는 질리는 인간이었다. 질린다는 느낌은 싫증이 나 미움과는 확연히 달랐다. 최악이었다. 나에게 질려 버리자 나는 꼼짝할 수 없었다. 내 몸, 내 목소리, 나의 일, 나의 습관, 나의 생활, 그 모든 것에서 손을 떼고 싶었다. 제발 그만 찾아오라고 말하고 싶었다. 내게서 무관해지고 싶었다.
-p117


내가 내게 질린다는 것.. 하지만 결코 무관해질 수 없는 관계.

꼼짝할 수 없이 마비되어 버리는 상태. 그 누구도 해결해 줄 수 없는 난제...




여태 본 당신 중에 지금이 가장 진짜 같아.

고맙다는 인사에 대한 그 사람의 대답이었다. 요즘도 나는 가끔 그 말의 의미를 생각한다. 진짜와 진심을 생각한다. 우리가 함께한 시간을, 각자가 느꼈을 외로움을 생각한다. 이별이란 칼날이 우리 근처를 서성이던 시절 그 사람이 작정한 듯 내뱉은 말이었다. 당신은 관계를 더 좋아지게 하려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않는다고. 모든 걸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 두기만 한다고. 그때는 그 말을 그저 시비로 받아들였다. 호소가 아니었을까 하는 깨달음은 뒤늦게 왔다. 이별 아닌 다른 방법을 찾아보고 싶다는, 그 사람이 내게 보냈던 마지막 신호가 아니었을까. 그때 그것을 알았더라면 그런 식으로 미지근하게 헤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별에라도 최선을 했을 것이다.
-p155


관계를 위한 노력을 하지 않는 건, 그 노력의 끝을 알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다른 방법도 많겠지만, 그 어떤 것이라 해도- 끝은 같다는 예상 때문에 말이다.

최선을 다해 이별하는 것에 힘쓰지 않는 건 스스로를 위한 방어일지도 모른다.

미지근한 마음으로, 흘러가듯 헤어져야 덜 아플 거라는, 잔뜩 겁먹은 마음이 이별을 대하는 방어-




고아인 이유. 동성애자인 이유. 사실 이유가 어디 있나. 그냥 그렇게 태어난 사람도 있는 거지. 근데 반드시 이유나 사연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그런 걸 들어야만 납득하는 사람들이 있거든.
-p135


나도 언제 적엔 그랬었던 것 같다.

내가 이해되지 않으면 잘못됐다고 평가하던 시절.

세상의 기준이 나였다기 보다, 나의 기준이 나였던 날들.

내가 나의 다양한 부분을 허용하고, 타인과의 관계에 힘을 빼면서 '그냥 그런 것' 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어쩌면 이해와 납득이 필요 없이, 그냥 그래도 되는 것들이 전부일지 모르는데- 당연한 듯 이해를 요구하는 사람과의 대화는 잘 이어지지 않는다.

짧은 단편들이 모여있는 '겨울방학'은 침대에 툭 누워 읽기에도 좋았다.

아이들의 재잘대는 소리와도 잘 어울리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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