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4일, 2011년의 일기를 옮겨 쓰다.
감기에 걸렸다.
일교차가 심하다.
호주 날씨는 한국과 정반대로 간다.
봄-여름-가을-겨울(한국)
가을-겨울-봄-여름(호주)
그래서 크리스마스에는 모두들 해변에 모여서 일광욕을 하면서 맥주를 마신다지.
20년이 넘도록 당연하게 생각해왔던 계절의 변화, 상식 나부랭이는 여기서 통하지 않아.
그런 걸 보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식들에도 상당히 많은 편견과 자기중심적인 사고가 끼어있음이 분명하다.
지식을 쌓는 데에만 급급할 것이 아니라,
이제부터는 가지고 있는 지식이 내 습관적인 편견이 아닌지도 배워야 할 것 같다.
다행히도 오늘과 내일이 데이오프라 집에서 쉬고 있다.
오전에는 가까운 마을인 문두버라(역시나 만다린으로 유명한 지역)에 다녀왔다.
우리 밴드(워킹 홀리데이- 밴드 이름입니다) 세컨드 기타 누님이 드디어, 본인의 기타를 사기로 결정했거든.
한반장(밴드의 시발점- 발음을 잘해야 한다- 이자 퍼스트 기타)은 이미 온갖 장비를 다 가지고 있지.
기타는 물론이고, 튜너, 차도 있고, 지도도 있고.
다만 여자가 없는데 오늘 어떻게든 만들어 오려는 것 같다.
그는 오늘 캠핑을 간다.
내가 일교차가 심해서 밖에서 자는 것은 무척이나 힘든 일이 될 것이라고 얘기해주었다.
그랬더니, 그래서 간단다.
한반장은 남자다.
문두버라는 겐다(현재 제임스가 있는 곳)와 비슷한 사이즈의 타운이면서,
시트러스 타운이라는 점에서도 역시 공통점이 있다.
오랜만에 차를 타고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일이라, 몸은 무겁지만 그래도 들뜬 기분으로 길에 올랐다.
비치(이것도 발음을 잘해야 한다) 지역과는 반대로, 문두버라는 내륙으로 들어간다.
사실 이것이 나를 더욱 들뜨게 만든 이유기도 하다.
나는 이상하게 오지(Aussie 말고- Outback)가 좋다.
그래서 호주를 떠나기 전에, 꼭 한 번쯤은 홀로 조용히 태양과 황야가 가득한 내륙을 여행하고 싶다.
지금까지 다녀본 곳 중에 가장 대단했던 곳을 꼽으라면,
아마 미국 유타와 애리조나에 걸쳐있는 모뉴멘트 벨리를 손꼽지 않을까 싶다.
이시다 유스케(일본의 자유여행가이자 작가)가 본인의 저서에서 자랑한 것처럼,
나도 역시나 그곳에서 우주를 만날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그 후로 나는 사막에 대한 막연한 동경과 꿈이 있다.
하지만 사막은 소름 돋을 정도로 아름다운 곳인 동시에 죽음이 자리하는 무시무시한 곳이다.
아마도 그런 이유에서 일까?
살아서 돌아오면 많은 이야기를 가지고 올 수 있다는 작가주의의 발로인지, 나는 사막이 언제나 그립다.
오래간만에 마음 편하게 글을 쓰니까, 또 이야기는 어김없이 산으로 가는구나.
다시 돌아오면 문두버라.
문두버라도 피킹 일이 많은 지역이라 그런지, 외부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많았다.
한국인들도 엄청 많았고.
내륙으로 더욱 들어와서인지 원주민(애보리진들)도 더 많이 눈에 띄었다.
겐다에서는 한 시간 정도 차를 몰아가는 거리인데,
황량한 내륙으로 향한다는 기분 탓인지 타운보다도 가는 길이 더 즐거웠다.
가만히 차창 밖의 풍경을 바라보며(여기는 가도&가도 그냥 계속 같은 풍경) 이런저런 생각을 해봤다.
그동안에 들었던 생각들을 차례차례 옮겨놓고 싶은데 과연 그게 내 기억력으로 가능할지는 의문이다.
오늘은 창문에 비친 스스로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사람에게 스스로는 어떤 의미인가를 가늠해봤다.
나는(자신이라는) 존재는 관계에서 오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문득 하게 되었다.
모든 것과의 관계.
사람은 누구도 자신을 직접 바라볼 수 없는 구조로 창조되었다.
아마도 타인이 자신의 모습을 말해줄 수 있다.
아니면 타인의 행동으로 나라는 사람이 어떤지 알 수도 있고.
거울과 강물의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 조차도,
스스로의 힘에 의한 것이 아니라 외부의 힘에 의한 것인 것이다.
도대체가 내가 나를 볼 수가 없다.
그렇다면 과연 어떻게 보이지 않는, 나의 존재에 대한 의문을 가지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가.
나는 어디에 있으며, 나는 누구인가.
사실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언제고 찾고 있다.
그것이 아마도 내가 끊임없이 여행하는 (몸도 마음도) 이유일지도 모른다.
언젠가는 찾을 수 있을까.
여전히 알 수 없지만 오늘 조금은 진전이 있었던 것 같다.
스스로가 스스로의 존재를 인식할 수 있는 구조가 아니라,
이러한 인식이 타인과 세상과의 관계에서 온다는 사실.
이 사실은 대단히 흥미로운 사실이 아닐 수 없다.
아직도 많은 정리가 필요하겠지만, 본능적으로 사랑이라는 감정과 단어가 뇌리를 스쳤다.
사랑하며 살아간다는 것이야말로 나를 인식하는 가장 쉬운 방법이 아닌가.
관계에서 가장 강한 본드(끈끈이)가 되는 것이 사랑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에.
세상과의 관계에서 우리는 단절이 아니라, 사랑으로 더 단단해지면 질수록 나라는 존재가 더욱 명확해진다.
순간 진리를 찾겠다고 길을 떠나는 여행자의 (얄팍한) 자만심이 부끄러워졌다.
고독과 방황 (자유를 빙자한) 끝에서야, 나라는 존재를 알아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자신이 부끄러웠다.
지금에라도 이렇게 조금씩 배워가는 게 다행이다.
길에 오른 게 결국 나쁜 선택만은 아니었으니.
세상과 세상 속에서, 어떻게든 나와 관계된 모두에게 감사하고 감사한다.
그리고 언제고 누구에게나 최선을 다해 사랑을 주지 못함이 부끄럽고 또 부끄럽다.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만들자- 는 몹시 진부한 말이지만.
동시에 참으로 실천하기 어려운 말이다.
매 순간 더 큰 사랑을 전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래서 언젠가는 인류도, 우주도 품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