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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임스 Apr 23. 2016

전체주의, 단일성에 대한 단상

1월 30일, 2009년의 글을 옮겨 쓰다.

일본은 전체주의 국가다.
일명 '和'(Wa)라는 사상에 입각해 국민 모두가 단합되도록 요구받는다.

이 '和'라는 것은 이를테면, 반듯하게 정돈된 돌들이 가지런하게 쌓여있는 것과도 같다.
서로 똑같은 모습으로 차곡차곡 쌓인 돌들은 견고한 건축물을 이룬다.

일본 하면 떠오르는 것들:

질서, 깔끔하고 정갈한 모습,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행해지는 시민의식 등이 바로 그것이다.


실제로 일본에서는 지하철에 타고 내릴 때도 탑승객이 모두 하차하기 전까지는 누구도 열차에 오르지 않는다.
(서울 지하철 내 지옥의 러쉬를 경험한 이들에게는 실로 놀라운 일)
공공장소에서의 소음이 서울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적은 편이고, 길거리도 대체적으로 깔끔하다.
(바닥에 껌 붙은 자국이 거의 없다)


실로 대단한 모습은, 아이들의 모습이다.
이 '和'를 토대로 한 교육은 일본 교육의 진수다.

인솔자도 없는 유아 집단마저도 대단한 통일성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일본이다.


통일된 복장에, 통일된 행동양식의 일본 아이들은 이질감이 들 정도로 실로 신기한 모습을 보여준다.
남에게 폐를 끼치는 일을 수치스럽게 여기며, 가지런한 돌로 양성되는 이 과정은 학년을 거듭하면서도 지속된다.


하지만 여기서 나는 한 가지 의문이 든다.
만약, 이 가지런한 돌들 중에 모난 돌이 존재한다면?

'모난 돌이 정 맞는다'라는 말이 있다.
일본에서도 그런 게 아닐까.

전체주의와 단일성을 바탕으로 개인에게 요구되는 일본 특유의 잣대에 의해

이러한 개인은 사회적으로 질타받게 된다.
가정에서건, 학교에서건, 공공장소에서건 말이다.

소위 '왕따'라는 말도 일본에서 건너온 것으로 알고 있다.
집단에 어울리지 못하는 개인은 이 '왕따'로 치부되어, 사회와 격리되는 것이다.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말이다.

'和'라는 사상이 무서운 것은,

진정한 화합의 필수조건인 양보와 용서의 미덕을 포함하고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니면, 너 혹은 너희가 된다.

실제로 일본인은 내부적 단결력이 극도로 강한 나라다.
이를테면, 동호회나 친목모임의 결속이 우리나라의 그것과는 비교를 불허할 정도다.
아마도 이러한 결속이 집단의 전문성을 극대화시키지 않는가라는 생각도 해본다.
(전문가 이상의 정보와 지식수준을 지닌 동호회 집단이나 오타쿠 집단의 경우)

이러한 '우리와 같지 않으면 우리가 될 수 없다'라는 식의 전체주의, 단일성 사고가 위험해 보이는 것은 왜인가.

과거 군국주의의 향수를 가지고 있는 우익이 지배하는 일본이다.
수뇌부와 교육은 여전히 '전체'와 '和'를 강조한다.

이유는 물론, 더 잘 살고 더 부강한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이다.
한 나라가 선택한 노선을 누가 함부로 뭐라고 할 수 있겠는가.

다만, 개인적인 입장에서 우려되는 것은

더 잘 사는 나라를 위한 단결의 사상이 자칫 분열의 시발점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일본은 유독 강한 개성과 젊은이들의 자유로운 패션으로 유명하다.
어라?
무언가 조금은 이상하지 않는가?
일본은 통일성을 강조하는 '和'의 나라가 아닌가?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실제로 거리에서 만나는 일본 젊은이들의 패션감각과 개성은 감탄할만한 수준이다.
그리고, 이런 개성을 보는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도 느낄 수가 없다.

하지만 진정으로 따가운 시선을 보내지 않는가?
'和'로 인해 스스로가 타인에게 따가운 시선을 주는 모난 돌이 되고 싶지 않기 때문은 아닌가?

이 지나친 개성과 유행에 민감한 모습은 사실 '현시대'의 일본 '젊은이'들만의 특성처럼 보인다.

아까 보여준 사진들에서와 같이 유아와 어린 학생들의 경우, 교육에서부터 단결을 요구받는다.
가지런한 모습이다.

어른들의 경우는 어떤가.
여타 戰後세대의 전형적인 경우처럼, 근면하고 성실하게 '和'를 바탕으로 나라를 일으켜 세웠다.
(일본의 과거 경제성장세는 미국의 원조가 있다손 치더라도, 실로 기적적인 수준이다)

그들은 속으로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내 시절엔 저런 놈들은 찾아볼 수도 없었는데, 웬 엉터리 같은 행색을 하고 지 잘난 맛에 살고 있군."

그렇다면 지금의 젊은이들은 어떻게 이렇게 강한 개성을 가지게 되었는가.

자라면서 '和'의 사상을 교육받아 왔지만, 불행히도 시대가 달랐다.
현대 문물과 서구의 개인적인 문화는 물밀듯이 밀려왔다.
이 모든 게 서로 뒤엉키면서 단결은 요구받고 있으나,

마음 한구석에는 새로운 문화와 개인에 대한 인식이 커졌을 것이다.

어느 순간에는 결국 한계에 부딪친다.
질풍노도의 청소년기이건, 졸업을 하고 교육에서 해방되는 시기이건 말이다.


이후, 자신의 개성에 대한 표출의 자유의지 혹은 분노가 커질 것이다.
(그간의 세월을 마치 보상받기라도 하는 것인 마냥)

그들은 아마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이게 나다. 내가 나답게 사는데 다른 사람이 무슨 소용이야? 그냥 멋대로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살래."

일본은 단합과 화합으로 지난 수백 년을 살아왔다.
하지만, 지금 일본은 세대 간의 분열과 장벽이 눈에 보인다.

미국은 건국부터 개인주의가 태생이기 때문에 이러한 수준의 분열을 거의 겪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는 애초에 사상이 '和'와는 다르기 때문에 역시 이와는 경우가 조금 다르다.

아르바이트만으로 생활한다는 '프리타', 그냥 거의 노는 수준의 '니트'라는 말 또한 모두 일본에서 생겨났다.
물론 이것은, 비단 젊은이들의 이야기다.

지금쯤 국가와 일본의 어른들은 한숨을 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찬란한 한 나라의 위상이, 보이지 않는 세대 간의 단절에 조금씩 잠식당할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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