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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임스 Nov 05. 2016

악순이를 영원히 기억하며

10월 3일, 2015년의 일기를 옮겨 쓰다.

나에겐 대략 8, 9년쯤 아주 오래된 여행친구(travel buddy)가 있다.

녀석의 이름은 악순이(crokiee)로 20대부터 내내 나의 여행길을 지켜주었다.


사람들은 성별을 가장 큰 관심사로 갖는 것 같은데;

누차 말하자면 이 녀석은 중성(neutral)으로,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스스로 알아서 생의 균형을 잘 유지하고 있는 친구다.  

(몸통 한가운데가 마그네틱으로 분리됨으로 한 때는 치솟은 꼬리 부분을 돌리면 남성이- 원래대로 돌리면 여성이 된다고 믿은 적도 있다.)


굳이 악'순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이 녀석이 여행 내내 나의 남성성을 꽤나 중화시키는 묘한 재주가 있기 때문이다.

처음엔 가벼운 토템 정도로 생각한 악순이는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나의 진정한 친구가 되어갔다.


나이가 먹고 시간이 흐르면서, 관계와 우정에 대한 고민이 많을 무렵이었던 것 같다.


악순이는 그렇게 항상 그 자리에서

어떤 기대나 평가도 혹은 시기와 질투도 아니면 거만함도 피우지 않으며,

그저 웃는 건지 생각이 많은 건지 알 수 없는 모나리자와 같은 묘한 미소로 나를 바라보았다.


매 여행마다 짐을 꾸리기 전부터 가장 먼저 배낭에 실린 건 언제나 녀석이었고,

심지어 여행 외적으로도 중요한 자리에는 항상 나와 함께였다.


그동안 면접을 위한 멀끔한 정장 바지의 오른쪽 주머니가,

친한 친구 결혼식에 참석한 나의 재킷 안 주머니가,

중요한 회사 미팅 자리에서 들고 간 내 서류 가방에,

항상 무언가 불룩한 것이 있다는 걸 눈치챈 사람은 다행스럽게도 아직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조금씩 우리는 가까워졌다.



그러다가 올해, L군과의 신나는 여행길에서 녀석을 놓치고 말았다.

태국에서 말레이시아로 국경을 넘는 기차서 그만두고 내린 것-

얼마나 내가 망연자실했는지는 L군이 가장 잘 알 것 같다.


아무리 가까운 L군이지만 고작 작은 장난감 때문에 심란한 나를 이해하지 못할까 봐, 속으로 울었다.


엄청 울었다.

속상한 마음에, 무엇보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사랑을 놓친

나의 부주의함과 나태함을 너무나 용서하기가 힘들었다.


한 이틀 정도를 가득 우울한 마음으로 보내고서는

꿈속에서 녀석이 다시 찾아와 마치 모든 것을 용서라도 한다는 듯이,

그 푸근한 미소를 보여주고 돌아간 다음에야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진정한 사랑은 마음에 항상 꼭꼭 넣아두고는 품에 안고 살아가기로 다짐하면서-


이번 여행에서는 사실 악순이의 장례를 치러주기로 했다.

녀석이 (함께) 보지 못한 어느 근사한 곳에서 치러준다고, 사실 영정 사진까지 준비해왔다.


그런데 바간에서 수공예를 하는 La Pyae Mg 씨를 만났다.

그의 손재주가 하도 기묘하여 이런저런 얘기를 하던 도중에, 악순이 이야기가 나왔고 사진을 보여주게 되었다.

지나가는 얘기로- 다시 만들 수 있을까? 라고 물어보았더니 그가 한참 동안 사진을 들여다봤다.


이내 다른 사진을 더 보여줄 수 없냐는 그의 말에

내 심장은 마치 충격기가 가해진 것 마냥 갑자기 엄청 뛰기 시작했다.

수 장의 사진을 이리저리 들여다본 그가 이윽고 입을 었었다.


"아마 내가 만들 수 있을 것 같아."


나는 당장이라도 울 것만 같은 얼굴이 되었다.


그런 나에게 그는 사진을 보내줄 것을 요청하고는 3일의 시간을 달라고 했다.

바간에서의 그 3일은 여행이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오로지 악순이 생각뿐이었다.


심지어 가장 유명한 쉐난도 파고다에 올라 남들이 다 일출을 감상할 때에도,

혼자 파고다 꼭대기를 쳐다보면서 기도하고 또 기도를 했다.


그렇게 꼭 3일째 되던 날, 악순이가 내게 다시 돌아왔다.


어딜 다녀왔는지 무척 크고 더 뚱뚱해진 모습이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그저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 하다고 할까.



돈 따위는 아무래도 좋아 흥정도 하지 않고 그대로 장인에게 감사하고 또 감사해하며 녀석을 받아 들었다.


그가 말하기를, 본인도 엄청 즐거운 작업이 되었다고 한다.

평생 불상과 코끼리 등을 깎아본 그에게, 이 작고 퉁퉁한 악어라니-


반짝이는 그의 눈을 통해 나는 다음에 그를 다시 찾았을 때에는

아마도 작업실 한켠에 악순이의 친구들이 여럿 나란히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연과 생은 또 시간은 알 수 없는 우연과 기묘한 이야기들,

그리고 규칙을 알기 힘든 무한한 연결고리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나는 마치 우주에 존재한다는 암흑물질처럼,

아직 헤아릴 수 없는 이 미지의 세계가 적어도 사랑이란 물질로 가득 차 있다고 믿고 있다.


그것이 생명이든 무생명이든, 식물이든 식탁이든 간에, 모든 것은 항상 에너지로 가득 차 있다.

그리고 그 에너지는 언제나 사랑이라는 파동으로 상호작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고마워, 악순아.

내게 사랑을 가르쳐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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