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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임스 Mar 27. 2019

만달레이, 우베인의 석양

9월 22일, 2015년의 일기를 옮겨 쓰다.

비행기는 금방 방콕에 도착했는데 바로 연결해서 미얀마로 향하는 국제선을 재탑승해야 했으므로 조금 서두를  필요가 있었다. 승무원 친구인 Kelly의 말을 빌리자면, 에어아시아의 경우 오전 비행기는 연착이 적은 편이지만 오후로 넘어가면서 비행편의 출발시간들이 조금씩 밀려 오후 비행기의 경우에는 연착이 되는 경우가 꽤 많은 편이라고 했다. 이렇게 당일에 바로 연결되는 항공편을 예약할 때는 같은 아세안(ASEAN) 국가라고 하더라도 최소 3시간 정도의 텀은 두고 스케줄을 짜는 것이 좋겠다고 반성하게 되었다.


만달레이로 가는 비행기 옆좌석에는 다소 산만한 영국인 여행객이 나란히 앉아서 끊임없이 말을 걸어왔다. 컨디션이 썩 좋지 않았던 터라 의도치 않은 까칠함을 전달해드렸으나 새로운 여정에 한껏 들뜬 여행자에겐 별 부담이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만달레이 공항에서 시내까지는 에어아시아에서 직접 셔틀을 운행했다. 추가적으로 요금이나 교통편을 고민할 필요가 없어서 좋았다. 작은 시골에 놓인 터미널 같은 공항을 빠져나와서 버스는 열심히 달렸지만 속도감은 매우 더뎠다. 그래도 에어아시아의 상징인 레드로 크게 랩핑(Wrapping)된 버스는 뜨거운 태양 아래에 놓인 허허벌판을 양쪽으로 두고 곧은 도로를 쉴 새 없이 달렸다. 이어지는 비행에 속이 좋지 않은지 배가 자꾸만 꾸르륵 거려 한 손으로 연신 배를 문지르면서도 이 이질적인 공간에서 만나는 낯섦에 거듭 피식거리며 웃음이 났다.


목적지에 다다르며 한껏 차오른 도전감은 버스의 문 밖을 한 발, 그리고 두 발 벗어나 두 다리로 땅에 서자마자 휘발되듯이 증발해버렸다. 너무나도 더웠다. 살면서 좀처럼 체감해보지 못한 더위가 내게 깔끔한 카운터를 날렸다. 그래도 기세가 꺾이기는 싫은 마음에, 잠시간 찌푸려진 미간에 힘을 주고 성큼성큼 숙소를 찾아 걸었다. 숙소는 한산했다. 깨끗하고 위치도 마음에 들었다. 인도네시아에서부터 계속된 장거리 이동의 연속으로 지친 몸에게 휴식을 주기 위해서 3일을 쓰기로 했다.


짐을 두고서 바로 샤워를 했지만 밖에서 만난 더위에 대한 기억이 여전히 선명했기 때문에, 하루를 그냥 쉴까- 라고도 생각했다가 쉼은 내일도 할 수 있으니 가까워진 석양의 때를 맞춰 우베인 다리로 가기로 한다. 시간상 오토바이 택시를 잡아타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카운터 직원에게 정보를 물은 뒤 그가 알려준 가격에 흥정하여 기사의 뒷좌석에 올라타 그의 양 어깨를 잡고 우베인으로 향했다.


미얀마에 도착해서 계속 눈에 띄던 것이 남성들이 입은 기다란 치마와도 같은 하의였는데 기사 아저씨도 꼭 같은 옷을 입고 있으시길래 물었더니 론지(Longyi)라는 미얀마 전통의상이라고 한다. 하도 신기해서 사람들이 지날 때마다 쳐다보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나도 이 론지의 매력에 흠뻑 빠지게 된다. 기사님은 경쾌하고 과장된 동작으로 내게 직접 론지의 매듭 만드는 법을 알려주셨다. 나는 답례로 택시비에 200원 가량을 더 얹어서 내드렸다.


우베인(U Bein) 다리는 타웅타만(Taungthaman) 호수의 남북을 잇는 1.2KM에 이르는 세계에서 가장 긴 목조다리이다. 1850년에 지었다고 하니 수명이 170년이나 가까이 되었고 여전히 사람들이 지날 수 있는 다리이기도 하다. 이 곳은 무엇보다 세계적으로도 손꼽는 아름다운 석양으로 유명한 지역이다.


과연 명성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다. 굉장한 풍광이었다. 호수는 잔잔하고 은은했으며, 호수 위를 지나는 나무다리는 차분하면서도 안정감이 있었다. 일몰 시간에 다다르자 꽤 많은 숫자의 관광객이 다리 위를 양방향으로 지나다녔음에도 불안감이 전혀 없었다. 200년에도 족히 다다를 것 같았다. 석양이 호수 위로 가늘고 길게 내려와 앉으면서 사람들의 걸음이 하나둘씩 멈추기 시작했다. 물론 제 갈 길을 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론지를 입은 채 조심스럽게 또는 휘적한 걸음으로, 현지인들은 이 매일의 아름다움이 당연하다는 듯이 쉼 없이 발을 옮겼다.


만달레이, 우베인의 석양, 2015 @dalaijames


다리에 걸터앉아 카메라를 내려놓고서는 담배를 한대 꺼내 물었으나 불은 채 붙이지도 못하고 멍하니 낙조만 바라보게 되었다. 석양은 마치 마법과도 같았다. 해는 부드럽게 하강하며 이내 세상을 온통 황금빛으로 물들였다.


황금의 빛은 마치 온몸에 스며드는 듯 깊은 만족감과 힐링감을 줬다. 다리의 1/3 지점 즈음에 머물러 있었는데, 해가 다 떨어지기 전에 다리를 건너보고 싶어 서둘러 걷기 시작했다. 해를 등지고 걸으니 그림자가 길게 앞으로 드리워져 나를 이끌어 나갔다. 다리의 총길이가 꽤나 길었기 때문에 다시 돌아올 때는 세 번을 더 나누어 쉬고서야 입구를 빠져나왔다.


만달레이, 우베인의 석양, 2015 @dalaijames


첫날 우베인 다리를 보고 돌아와 이틀을 내리 느긋하게 쉬고 나니 좀 더 멀리 길을 나서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알아보니 만달레이에 오토바이를 빌려주는 곳이 있다고 해서 인터넷(Googling)을 뒤져보고 가게를 찾아가려다가, 매일 아침마다 방으로 조식을 가져다주고 수건도 갈아주는 직원의 정성과 노력에 보답하는 마음으로 내 대신 바이크를 빌려달라고 하고 손에 1,500짯을 쥐어 줬다. 그가 여느 때보다 환한 미소를 보이며 사라지더니 20분도 채 되지 않아 오토바이를 몰고 돌아왔다.


출발하기 전에 수선소에 바지를 하나 맡겼는데 한국돈으로 500원이 나왔다. 이 곳의 인건비는 꽤나 자주 나에게 미안한 마음을 덤으로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상 최상의 상태로 제공되는 그들의 성실한 노동력에 겸손히 고개가 숙여지기도 하고.


바이크에 기름을 넣으려고 하니 분명 91이라고 적혀있는데 가게에서는 95를 넣으라고 한다. 95가 더 비쌌는데 기껏해야 1리터에 천 원이었으므로 두 통을 사다가 넣었다. 지도를 보니 사가잉(Sagaing) 지역을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다시 우베인에 들러 석양을 보면 좋을 것 같았다.


만달레이에서 쉬는 동안 가까운 곳에 한식당이 있어서 한 번 먹고서는 매일 찾아가게 되었다. 한식을 안 먹다가 다시 먹으니 쉽게 유혹을 끊기가 힘들었다. 오늘도 불고기를 주문해 길을 떠나기 전에 배를 든든히 채운다. 바이크가 있으니 사가잉 방향으로 가면서 걸음 하기 힘들었던 동네의 골목들을 괜히 들쑤시고 다녔다. '아, 또 여기 사는 사람들 모습은 이렇구나'하며 계속 지그재그 혼란스러운 동선의 주행을 이어갔다.


만달레이, 우베인의 석양, 2015 @dalaijames


미얀마는 도로와 교통의 사정이 상당히 열악했으므로 주행에 신중을 기했다. 더 이상 한눈을 팔지 않고 사가잉으로 곧장 달리기로 마음을 먹고 나서도 바이크의 속도는 여전히 더뎠다. 그냥 편안한 마음으로 주행하는 길과 시간 자체를 즐기기로 한다. 몇 번이나 길을 잘못 일러주고서 다시 돌아가라는 구글맵 내비게이션을 중도에 포기하고 직감에 따라 달렸다. 한 시간이 좀 넘자 사가잉으로 보이는 마을이 눈에 들어왔다. 높은 언덕 위에 커다란 파고다가 있는 사원이 멀찍이서도 보였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방향을 잡을 수 있었다.


도시를 벗어나니 새로운 미얀마가 보이는 것 같았다. 정말 평화로웠다. 오는 길에는 건설현장을 많이 봤는데, 아마 주요 도시를 중심으로 뻗어나가며 발전하는 것이겠지. 이 고요와 평화가 오랫동안 지속되길 바라는 욕심이 생겼다가 이내 이 곳 미얀마인들에게는 어느 편이 더 그들의 행복감에 도움이 되는 방향일지 궁금해졌다.


바이크를 두고 산에 오르기 시작했고 조금 서두르다가 아무래도 오늘의 석양은 사가잉이 좋을 것 같아 다시 느린 걸음으로 모드(Mode)를 바꿨다. 도시나 사원에 대한 구체적 지리정보 등이 없어서 눈에 보이는 가장 높은 곳을 찾아서 올랐는데 결국 그것이 최고의 선택이 되었다. 산 정상에서 사가잉을 내려다보며 석양을 즐기고 꼬박 한 시간을 다 채우고 나서야 하산을 했다.


만달레이, 우베인의 석양, 2015 @dalaijames


우베인의 일몰을 못 본 것이 못내 아쉬워 다음 날에 그대로 같은 바이크를 대여해서 기어코 다시 다녀왔다. 지금도 만달레이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우베인에서의 정말이지 환상적인 석양이다. 사진을 찍으러 갔다가도 매번 사진을 찍지 못했다. 이는 다음의 방문에도 몇 차례나 반복이 되었다. 왜 영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에서 숀 펜이 마지막에 아름다운 설범(Snow Leopard)을 두고 셔터를 누르지 않았는지, 그 마음이 조금 이해가 되었다면 과장이 지나친 것일까.


30여 년을 더 채워서 200년이 된 다리 위를 걷는 상상을 해봤다. 그때는 다리를 걷는 나도 인생의 황혼기에 다다러 있겠지. 그때가 온다면 나 역시 만달레이, 우베인의 석양에 이질감이 없이 그대로 녹아들고 싶다. 욕심이 지나친 것이 아니기를.


흐르는 시간과 세월에 순응하며 아름답게 살며 또 그렇게 늙어가고 싶다.


만달레이, 우베인의 석양, 2015 @dalaija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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