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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임스 Apr 02. 2019

인레호 챕터(Chapter)

10월 2일, 2015년의 일기를 옮겨 쓰다.

바간을 떠나 인레호수로 가는 날, 아무런 정보도 없이 그저 버스 티켓을 한 장 끊고 간다. 9시 출발인 버스의 픽업은 7시 30분이었다. 계속해서 숙소 방문을 노크하길래 나가보니 스태프가 언짢은 표정으로 서있다. 아니, 픽업을 얘길 해줘야지?


부랴부랴 준비해 스태프의 E-바이크(전기 바이크)를 타고 터미널로 갔다. 장거리 이동이라 화장실이 걱정되어 어제저녁부터 좀처럼 물을 마시지 않았다. 갈증이 났지만 계속해서 무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동 내내 화장실이 가고 싶은 몸과 마음을 참아내느라 정말 고생했다.


비행기 수준의 서비스를 자랑한다는 JJ익스프레스의 버스는 꽤나 쾌적했다. 내부 공간과 시트도 넓었고, 구닥다리 버스가 아니라 나름 신식의 버스였기 때문에 안심이 되었다. 다만 여전히 화장실이 없는 것은 아쉬웠다.


인레호 챕터(Chapter), 2015 @dalaijames


버스는 한참을 달렸다. 창밖으로는 근사한 구름들이 떼를 지어 버스를 따라왔다. 아마도 그 유명한 껄로(Kalaw)에서의 트레킹은 이런 구간을 직접 두 발로 걸어가는 것일 테지. 휴대폰의 안테나의 신호 막대가 하나둘씩 떨어지더니 결국 완전히 끊겨버리고 버스는 이내 춤을 추듯이 산을 굽이굽이 곡예주행을 시작했다. 다행히도 컨디션이 좋은지 멀미는 크게 없었다.


껄로냐 인레냐 둘 중 고민할 것도 없이, 버스는 껄로를 지나서 인레호수 근처의 마을인 낭쉐에 나를 내려주었다. 하차하자마자 비가 한바탕 쏟아지는 바람에 잠시 터미널로 쓰이는 듯한 가게로 대피한 후 다시 금방 그친 비를 피해서 숙소를 탐색하기 시작한다. 역시나 25달러를 불렀다. 25달러는 만달레이에서부터 바간, 그리고 이 곳에서까지 마치 표준요금표에 붙은 가격인 마냥 나를 따라다녔다. 마음에 드는 가격과 방을 구하기가 쉽지 않음을 직감하였으나, 오랫동안 버스 안에만 있었기 때문에 좀 더 발품을 팔기로 했다.


인레호 챕터(Chapter), 2015 @dalaijames


결국 방보다는 테라스가 꼭 마음에 드는 게스트하우스를 찾아 1박에 12달러에 타협을 보았다. 지친 몸을 맡기는데 몇 달러를 가지고 더 몸을 혹사시키고 싶지가 않았다. 숙소는 전체적으로 깔끔하고 조용했다. 짐을 풀어두고 식사를 하러 다녀왔는데 역시 허기진 배를 서둘러 달래려다 보니 생각보다 지출이 컸다. 미얀마에 와서부터 초행이기도 하고, 같은 연유로 적극적으로 흥정에 나서지 않다 보니 식사비 등 전체적인 여행경비가 눈에 띄게 늘어나고 있었다. 주의해야 할 것 같아 생각과 전략을 다시 환기시키고 식당을 나왔다. 마을을 천천히 둘러보고 시장에서 과일을 몇 가지 사서 숙소로 돌아왔다.


별 일 없이 하루를 쉬고 다음 날, 아침부터 비가 세차게 내렸다. 오전부터 내린 비는 정오가 되어도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가까운 곳을 찾아 점심을 먹으러 갔는데 '레드스타'라는 이름의 작은 식당이었다. 나처럼 비를 피해, 저렴한 끼닛거리를 찾아온 같은 처지의 여행자들이 하나 둘 식당으로 몰려들었다.


처음은 덴마크에서 온 콜센터 직원 Jacob, 그다음 Emily 역시 덴마크에서 온 배우 지망생이었다. 그녀는 오디션에 계속 낙방하는 바람에 스스로를 다시 돌아보기 위해 여행길에 나섰다고 했다. Aileen은 한국에서 긴 휴가를 내고 온 공무원인데 신기하게도 나와 같은 빨강머리를 했다. 직업을 듣고 다시 되물어 쉽지 않은 일이 아니냐고 했더니 대답 대신에 개구진 웃음을 줬다.


서로 간 주문한 식사를 앞에 두고 널뛰기 대화를 나누다가 결국 자리를 모여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다들 이 곳 인레에 도착한 지가 하루, 이틀이 채 되지 않아 내일은 모두 함께 보트 투어를 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제안이 나왔다. 투어의 비용이 인원이 아니라, 보트당 계산이 되기 때문에 인원이 많을수록 개인의 부담은 적어진다. 거절하는 사람 한 명이 없이 모두 내일을 함께하기로 했다. 자연스러운 수다 덕분인지 시간은 금세 지나갔고, 비가 그치자 다들 자연스러운 타이밍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같은 한국인인 아이린(Aileen)을 따라나섰다. 이 마을 근방에 와이너리가 있다고 한다.


미얀마에 와이너리라니? 각자 자전거를 구해서 타고 한적한 시골길을 30분가량 달리니 산속에 정말 와이너리가 있다! 3천짯에 총 4잔의 와인을 주는데, 맛은 차치하고 포도밭이 산 능선을 따라 있고 정상의 부근에 테이스팅(Tasting)을 위한 테이블이 있었기 때문에 지는 석양을 안주로 삼아 마실 수가 있었다. 괜히 와인잔에 석양을 담아보기도 하고 즐겁고 실없는 장난을 하며 시간을 보내고 내려왔다.


인레호 챕터(Chapter), 2015 @dalaijames


마을로 내려와서는 이 기분 좋은 취기를 그냥 보내기는 아쉬운 마음에, 오후의 멤버를 다시 모아서 약품 맛이 나는 만달레이 럼(Rum) 한 병을 다 비웠다. 바로 걸을 수 없을 만큼이나 취해버려서 숙소로 돌아오는데 꽤나 애를 먹었다. 새벽녘 술김에 길가에 누워있는 개들에게 장난을 걸었다가 그들의 먹잇감이 될 뻔했다. 다음 날 아침에 숙소 직원에게 무용담처럼 얘기하니 이 곳의 개들은 해가 떨어져 어둠이 깊어지면 사나워진다고 한다. 그것도 모르고. 괜히 목덜미 뜯길 뻔.


여튼 살아서 돌아와 아픈 속을 비비며 부랴부랴 일어나 7시 30분까지로 약속한 보트 미팅(Meet-up)에 나갔다. 공무와 스케줄에 익숙하기 때문에 이 정도는 기본이라며 아이린이 가장 먼저 시간 내에 와 있었고, 내가, 그리고 제이콥이, 나머지 친구들이 차례로 등장했다. 총 7인이나 되는 바람에 보트를 두 대 대여하려다가 그냥 한 배에 의자를 빼고 7명이 타기로 한다. 인당 3천짯으로 종일(All Day)의 투어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인레호 챕터(Chapter), 2015 @dalaijames


인레호(Inle Lake)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컸다. 사공은 첫 기착지를 모닝 마켓으로 정하고 뭔가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배 뒤편에 서서 모터가 달린 노를 잡았다. 모닝 마켓으로 가는데만 호수 위에서 30분 정도 달린 것 같다. 여태껏 봤던 어떤 풍경보다도 더욱 현지인들의 삶의 모습에 가까운 그런 시장이었는데, 다분히 이질적이면서도 거리감이 멀지 않게 현지인들의 사는 일상의 사이에 끼어들 수 있는 곳처럼 느껴졌다. 일행과 함께 투어로 온 것이 금방이나 아쉬워질 정도의 멋진 풍경들에 발걸음에 자꾸만 여유가 사라졌다.


인레호 챕터(Chapter), 2015 @dalaijames


나만 그렇게 느끼는 것은 아닌 듯, 서양 사진가들로 보이는 몇몇의 사람들이 그들의 대포(Cameras)를 장전하고 무작정 시장과 사람들을 찍어대고 있었다. 갑자기 마음이 확 불편해져서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카메라를 꺼내어 나도 그들의 면전에 가져다 대었다. 반항심 내지는 청개구리 같은 마음이었을까. 집중하던 시선을 카메라에서 나에게로 옮기는 그들을 빤히 보며 일부러 몇 장 찍었다. 작은 총이지만 나도, 빵야 빵야. 하듯이.


피사체였던 과일 파는 아주머니께 최대한 정중한 미소를 보이며 황당한 표정의 서양인 무리를 뒤로 하고 달아났다. 조금이라도 느끼는 게 있으면 좋으련만. 사진을 찍는 일이 총을 겨누는 일과 같을 수 있다는 분명하고 평범한 진리에 대해 나 스스로도 다시금 생각을 곱씹어보고 시장가 부두로 돌아와 다시 보트에 몸을 실었다.


인레호 챕터(Chapter), 2015 @dalaijames


인따(Intha) 유적지, 고양이 사원까지 사공은 게으름과 핑계가 없이 우리에게 가득 찬 일정의 하루를 선사했다. 덕분에 다양한 국적의 친구들과 어우러져 로컬도 탐방하고 여러 주제의 이야기들을 쉴 새 없이 풀어냈다. 인따 유적에서는 뷰포인트(View Point)에 오르는 것보다도 그냥 사원에 눌러앉아서 고양이 한 마리와 나란히 누워있는 게 더 좋았다. 수상마을은 일전에 캄보디아 톤레삽 호수에서도 본 적이 있는데 여전히 꽤나 신기해서, 나중에 오게 되면 이 곳만 따로 떼어서 살펴보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지나가는 배에 손으로 하트를 날리는 아이의 시크한 표정이 보트 위에 모두를 크게 웃게 만들었다.


인레호 챕터(Chapter), 2015 @dalaijames


마을로 돌아와 어제와 꼭 같은 인원 구성으로 또 같이 만달레이 럼 한 병을 나누어 마셨다. 다음 날 아이린은 체크아웃을 하고 낭쉐를 떠났고, 나는 한낮에는 하릴없이 마을을 어슬렁 거리거나 자전거를 타고 이 방향 저 방향을 목적 없이 탐험하는 일이 계속되었다. 그리고 해가 떨어지고 마을에 어둠이 오면, 꼭 기존의 멤버에 한 명이 사라지고 또 한 명이 새로 오는 식으로 맥주와 럼주가 한데 섞인 골(치) 아픈 밤이 계속 이어졌다.


인레호 챕터(Chapter), 2015 @dalaijames


그 주간의 일기에는 취한다, 취했다는 표현이 자주 등장하고 대신 상세한 일정의 기록이 드물었다. 나 역시도 낭쉐를 떠나 양곤으로 향하는 마지막 여정의 전날 밤에야, 여전한 꼬부랑글씨로 이렇게 쓰여있다.


'마지막 석양이라고 생각하니 아쉬움이 오는 일을 막을 방법은 없었다. 이 곳에서의 시간도 이제 흘러갔고 다시 잡을 수 없는 물, 바람이 되었다. 그래도 인연과 추억을 소중하게 간직하겠다는 의식적인 노력은 내가 약속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소중하다면 또한 그만큼 진실되게 기억할 것. 마음을 먹는 일보다 항상 행동하는 일이 어렵지만 끊임없이 실행할 것.'


미얀마와 인레호가 선물한 아름다움으로 잊히지 않는 풍광의 사이사이에 인연들을 넣어두고서, 그렇게 또 여행의 한 페이지를 정리하고 마무리한다.


인레호 챕터(Chapter), 2015 @dalaija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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