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앙마이에서 빠이로 가는 길

#044

by J임스

#044


컨디션 최고.


치앙마이까지의 고단한 종단에 지친 몸을 다독이며, 여행자들에게 이리저리 정보를 모았다.

여기까지 왔으면 인근에 위치한 빠이(Pai)를 가봐야 한다는 것이 중론이었다.

다만 산을 가로지르는 5시간여의 구불구불한 여정이 계속되므로,

몸고생 꽤나할 것이라는 말들도 덧붙여 주었다.


하릴없이 쉬던 어느 날, 기상하니 유독 날이 밝다.

컨디션마저 최고.

아무래도 빠이로 떠날 운명인 듯했다.


아침부터 키미테를 붙인다.

4시간 전에 붙여야만 효과가 있단다.

그래서 꼭 4시간 전에 붙였다.

있다가는 멀미약도 먹을 거다.


나는 멀미가 정말 싫다.


멀미 자체가 싫다기보다는, 멀리로 인해 세상에 눈을 돌릴 수 없는 그 시간들이 너무 아깝다.


시장에서 만났던 독일인 친구들 산드라와 레나가 페이스북으로 연락이 왔다.

두 아가씨들도 오늘 빠이로 떠난다고 한다.

아침에 게스트하우스 앞에서 만난 후에 함께 움직이기로 했다.


일찍부터 그녀들을 기다리고 있다가 식당에서 우연히 한국인을 만난다.

세네갈에서 2년간 봉사활동을 하고 막 고국으로 돌아가시는 참의 어르신이었다.


한참을 이야기 나누던 중에,

삶에 아무런 접점이 없을 것 같던 두 사람의 사이에서도 불쑥하고 공통분모가 튀어나온다.

나도 모르던 사이에 후배가 세네갈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세상 참 좁다며 농담하는 중에도

이 커다란 생이란 것은, 그리고 삶이란 것은, 곧 관계임을 다시금 깨닫는다.


빨간색의 썽태우를 타고 터미널로 갔다.

운전사 아저씨가 귀걸이부터 선글라스에 화이트 셔츠까지 차려입은 멋쟁이시다.


중국계 태국인인 아저씨는 짧은 시간 동안에도 가족의 소중함에 관해 이야기를 하셨다.


4명이 터미널에 도착하니, 빠이를 가는 오늘의 마지막 버스에 남은 좌석은 단 3석.

어쩔 수 없이 한 명은 입석으로 가야 한다.

멀미 때문에 불안했지만 어쩔 수 없이 돌아가며 앉아가기로 했다.


작고 앙증맞은 로컬버스가 들어오니 기다리던 모든 여행자들의 웃음보가 터졌다.


보기만 해도 답답한 사이즈의 작은 미니버스지만

왠지 오히려 모든 게 더욱 여행자의 마음을 들뜨고 설레게 했던 것 같다.


탑승.


그런데 차 안에서 현역 군인처럼 보이는 현지인 한 명이 방황하며 눈치를 보기 시작한다.

아무래도 누군가가 이미 자기 좌석에 앉았나 보다.


그래서 한자리가 비었다.

냉큼 달려가서 앉아버렸다.


멀미는 그렇게 나를 너무도 쉽게 염치없는 놈으로 만들었다.


차는 시내를 벗어나 한참을 달렸다.

그렇게 한 시간을 조금 넘게 달리니 산길이 나온다.


여행자들 사이에 악명이 자자한 죽음의 커브길이다.


로컬버스를 탄 것이 마치 훈장이라도 된 듯 득의양양했던 외국인들의 얼굴이

하나둘씩 하얗게 질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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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본인도 여행자인 주제에 마냥 남의 이야기인 듯 바라보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오늘 내가 키미테 덕분에 딱 그렇다.


뭐 괜히 변태스러운 것 같기도 하고-


마침내 빠이에 왔다.

도시에서 저 멀리 떨어져 산속으로 숨어버린 작은 마을.

걸음마다 산내음이 들린다.


이내 지는 석양과 함께 마을은 곧 음악으로 가득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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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쳐나는 히피들 속에서 진실됨 따위의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이

그냥 그렇게 잔에 차오르는 달을 서로 기울이며 거하게 취해버렸다.


방갈로에 돌아와 잠이 들었다.

밤이 지나는 동안 쉴 새 없이 물어대는 모기들조차 즐겁다.


아무래도 오자마자 빠이에 취한 것 같다.


뭐 괜히 내가 변태스러운 것 같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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