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6
#056
베개맡에 놓인 일기장에는 언제 쓴 것인지 갸우뚱한 시구가 남아 있었다.
‘길고 긴 밤 추억으로 지새우다
색색으로 번지는 이야기
너의 미소에, 너의 숨소리에’
루앙프라방이 자랑하는 탁발(승려들이 공양과 보시로써 생활을 영위하는 것)을 보기로 했다.
새벽에나 만날 수 있는 장면인 덕분에, 제니퍼와 일찍 5시 30분에 만나기로 약속했다.
졸린 눈으로 부리나케 일어나 나갔다.
분명 약속한 시간인데도 그녀가 보이지 않는다.
하는 수 없이 혼자 마을 중심으로 향했다.
이제나 오는지 저제나 오는지,
보이지 않는 탁발 행렬 때문인지,
나타나지 않은 제니퍼 때문인지,
알 수 없는 초조함으로 여전히 어둑한 새벽의 기다림은 계속되었다.
그러다가 멀리서 북소리가 들려왔다.
잡다한 생각의 바다에서 나를 끄집어내는 듯한 차분하면서도 진중한 소리가 나를 깨운다.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에서 어스름한 새벽빛을 등지며 한 무리의 승려들이 긴 행렬로 다가오고 있다.
노승을 선두로 행렬이 진행된다.
길가로 늘어서 있는 사람들의 공양을 받으며-
그중에는 마을 사람도, 멀리서 온 이도, 그리고 여행자도 있다.
멋진 사진을 찍으려 연신 셔터를 눌러대는 여행자들,
그런 익숙한 풍경을 조용히 바라보는 주민들,
아름다운 새벽의 빛으로 그 모두를 감싸는 도시까지,
마치 이 새벽에 루앙프라방의 모든 것이 보이는 듯하다.
순간 뇌리를 스치는 감정과 환희를 담아서 이 모두를 담고자 했다.
셔터를 한껏 열어놓은 채로 카메라를 사방으로 돌렸다.
이 순간만큼은 장면이 아닌 시간을 담고 싶다.
그렇게 간절한 마음으로, 진실하게.
작품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
그저 이 시간을 담고 싶다.
행렬이 끝나자 도시는 다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그렇게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돌아갔다.
숙소로 돌아와서 다시 자고 있었는데 9시쯤 제니퍼가 와서 나를 깨웠다.
캄캄한 도미토리 안에서도 그녀의 두 눈동자만큼은 지독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녀의 미소로 단번에 잠이 깨버렸다.
얼른 씻고 나가니 그녀가 나를 기다린다.
다시 그 매혹적인 자태 그대로.
오늘은 어제보다 눈부시다.
그녀도, 하루도.
모든 것이 조금씩은 더 아름다워진 것 같다.
그녀가 내게 미안하다고 한다.
여행자가 서로에게 굳이 얽매일 필요는 없으니, 나는 괜찮다고 말해주었다.
이제와 돌아보니 절반 정도는 진심, 절반은 빈 말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오늘은 오토바이를 빌려 좀 더 멀리 나가보기로 했다.
오토바이를 타본 적이 없는 그녀가 그냥 내 뒤에 함께 타기로 했다.
단단히 나를 잡으라고 몇 번이나 이야기했건만, 어느새 그녀는 가녀린 팔을 뒤로 돌려 오토바이의 몸체를 단단히 잡고 있다.
사실 제니퍼는 나보다 어린 친구임에도 종종 내 마음을 다 읽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진짜 필요할 때만 빼고는-
본인도 그녀와 같은 베트남 출신이라며 우리를 반겨준 바이크 샵 주인이 매우 흥미롭다.
단지 몇 분 서서 함께 이야기를 나누어봤을 뿐인데도 그의 눈빛이 그가 살아온 다채롭고 아름다운 삶을 전해준다.
본인 역시 캐나다로 이민을 간 가족이 있다고 한다.
주인은 한참을 그렇게 제니퍼와 나란히 마주 서서 이야기를 나눴다.
두 사람의 대화를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미소가 번진다.
어제 폭포 쪽을 지나서 뻗어 난 길을 더 탐험해보기로 한다.
시원한 산바람과 길을 따라 주욱 달리다 작은 마을에 정차했다.
마을 언덕 위에 뭔가 있길래 올라가 봤더니 학교가 있다.
오늘 수업은 없는 것 같다.
텅 빈 학교를 돌아봤다.
아마도 우리네 70년대에나 봤음직한 풍경이다.
지나보지 못한 시간이지만 그냥 그렇게 느껴졌다.
학교 뒤로 또 자그마한 언덕이 있길래 넘어갔다.
꽤나 높이 올라온 듯, 멀리 산과 산이 굽이쳐있는 모습들이 눈에 보인다.
제니퍼가 가리키는 곳을 쳐다보니 한 백 미터쯤 되는 곳에 작은 오두막이 하나 있다.
우리는 그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두세 명 정도는 누울 수 있음 직한 넓이의 평상이 비스듬한 볏단의 그늘 아래에 놓여있다.
그녀와 나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평상에 올라가 누웠다.
눈에 보이는 겉은 볏단이지만 마음에 비친 것은 하늘이었다.
가만히 불어오는 바람과 고요함 속에 실려오는 주변의 모든 소리가 두 사람을 감싼다.
그렇게 둘은 같은 미소를 지으며 서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그렇게 삼십 분여를 보냈다.
마냥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로.
도시로 돌아와 이번에는 반대 방향으로 가보기로 했다.
꽤나 달려야 하는 거리지만, 빡우 동굴(Pakou Cave)이 있다고 한다.
예기치 못한 공사구간이 몇 번이나 나타나 도로가 상당히 위험했다.
하지만 그녀에게 피로와 두려움을 전하고 싶지 않아서 꽤나 집중하며 운전을 했던 것 같다.
목적지에 다다르니, 동굴에 접근하려면 메콩강을 건너야 했다.
나룻배꾼을 사서 강을 건넜다.
나는 물을 무서워한다.
더욱이 이렇게 바닥을 알 수 없는 흙탕물인 경우에는 더더욱 그렇다.
강을 건너는 내내 이 가늘고 긴, 그리고 심각하게 불안한 배에 몸을 실은 이유를 찾아봤다.
아무래도 건너편에 마주 앉아서
무심한 듯 강을 바라보고 있는 이 여인에게 그 이유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여하튼 건넜다.
동굴을 구경하는 동안 내내 다시 건너갈 생각만 하기는 했지만.
살아서 마을로 돌아오니 이미 해가 졌다.
해가 그렇게 긴 곳인데, 괜히 밤이라는 녀석이 제시간보다도 빨리 찾아온 것 같기도 하고-
하루 종일 함께 있었으면서도 헤어지고 싶지 않은 마음이 통했는지
둘 다 누가 뭐랄 것도 없이 자연스러운 걸음으로 어제 갔던 바를 다시 찾았다.
어제와 같은 밤이 이어졌다.
나란히 의자에 기댄 채로 달과 어둠뿐인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다만 어제보다는 더 조용하고, 더 익숙한 느낌으로.
그렇게 또 나는 취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