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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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도착하니 그 유명한 ‘폴루’(타이타닉이라는 게스트하우스의 주인)가 역에 나와있다.
여행자가 찾으러 가기도 전에, 먼저 찾아오는 이런 주인장이라니-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보통 한국인 여행자들을 기차역에서부터 대부분 챙겨가는 모양인데,
오늘은 나 밖에 없어서 조금 실망한 눈치다.
한국말이 아주 수준급이었는데, 아니 수준급이라고 말하기도 조금 부족했다.
괜히 내 영어까지도 부끄러워지는 수준의 엄청난 한국말을 구사했다.
예상치 못한 그의 픽업으로 금방 숙소에 도착해서 짐을 풀 수 있었다.
당분간은 쉬고 갈 요량으로 좀 좋은 방을 원했는데, 아무래도 그런 운까지는 없었나 보다.
1층 계단 바로 옆에 위치한 방을 배정해주고 폴루는 그대로 사라졌다.
뭔가 너무 모든 게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괜히 힘이 빠져버렸다.
역시나 세상은 아이러니로 가득하다.
일단 침대에 쓰러져 쏟아지는 잠을 허락했다.
꽤나 피곤했는지 깨어보니 어느새 정오가 훌쩍 지났다.
배가 슬슬 고파져서 식당이 있다는 루프탑으로 올라갔다.
한국인을 주로 상대하는 숙소라서 식당도 역시 한식이 있다.
아무래도 정말 편하게 쉬다가 갈 수 있겠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식당 주인은 ‘가지’라는 친구였는데, ‘형님’이라는 단어를 입에 달고 산다.
액면가는 분명히 네가 형님인데 자꾸 내게 형님이라고 하니 괜히 어색하기도 하다.
사실 가지는 정말 좋은 사람이었다.
한국말을 폴루만큼 잘하는데, 이 두 주인장 덕분에 몇 번이고 내 언어 습득력에 대해서 좌절하고는 했다.
음식 맛도 괜찮았다.
자이살메르에 지내는 내내 이 두 인도인이 한국인들을 다루는 모습을 보면서 감탄을 멈출 수가 없었다.
한국에 한 번 와본 적이 없는 두 사람이,
한국인보다도 한국인에 대해서 더 잘 알고 있는 건 아닐까- 라는 느낌을 받은 적이 많다.
누군가를 안다는 것은 그만큼의 노력이 필요한 것일까.
식사를 마치고 차를 마시고 있는데 두 명의 아가씨가 옥상으로 올라왔다.
로와 첵은 둘 다 홍콩 출신으로 각각 꽤나 커다란 사진기를 지니고 있었다.
사진에 관심이 많은 그녀들의 취향 덕에, 우리는 꽤나 오래 수다를 떨었다.
로와 첵의 사진을 보니 같은 여행을 한 두 친구의 너무도 다른 두 시선이 느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들은 좋은 짝인 것 같았다.
조금은 부럽기도 하고-
우리는 릭샤꾼을 고용해서 도시를 둘러보기로 했다.
폴루가 시티투어를 시켜줄 수 있는 릭샤꾼을 불러줬다.
셋 다 뭔가 비장한 얼굴로 카메라를 어깨에 걸고 나왔다.
저마다 마음속으로 ‘좋은 사진’을 기대하고 있을게 분명하다.
우리는 가디사가르 호수, 과거 재상의 사저였던 하벨리(Haveli)를 거쳐 선셋 포인트로 이동했다.
릭샤꾼이 자꾸 외진 곳으로 우리를 데려가길래 도대체 어디로 가는 걸까 생각했는데,
이윽고 릭샤가 멈춰 서자 모든 궁금증이 해결되었다.
한눈에 자이살메르 성과 주변의 전경이 눈에 들어온다.
드넓은 사막의 한가운데에 정교한 모습으로 서 있는 성과 집들의 조화는 실로 엄청났다.
우리 모두 막상 사진은 별로 찍지도 않고 그저 흙벽에 몸을 기댄 채로
하나둘씩 켜지는 조명과 함께 다채로운 빛으로 변해가는 자이살메르의 풍경을 지켜보았다.
오른편엔 어느새 새로운 일행이 와있었는데,
모두 백인으로 중년의 여성과 두 남성이 와인을 한병 꺼내고 있었다.
미국인 여성과 두 프랑스 남자는 서로 오랜 친구관계로,
근사한 분위기를 내며 그들만의 여행을 즐기고 있었다.
사막도시의 절경을 바라보는 그들의 눈에서는 문득 시간이 보였다.
그윽한 시간이- 나도 언젠가는 내 눈에 시간을 담을 수 있을까.
숙소로 돌아온 우리는 맥주를 시켜서 다시 새로운 대화를 시작했다.
운비라는, 나보다도 곱상하게 생긴 청년까지 함께 이 여행자의 무리에 합류했다.
건너편에도 사막 사파리를 막 마치고 온 듯한 일행이 한창 시끌벅적했다.
자리에 앉은 채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서로 던지고 받았는데, 대부분은 실없는 농담들이었다.
갑자기 라오스에서 샀던 트럼프 카드가 생각이 나서 방에서 가져왔다.
마카오에 자주 놀러 간다는 로와 첵, 그리고 아무것도 모르는 운비를 데리고 게임을 시작했다.
한 시간이 채 되지 않아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홍콩 사람들은 모두 타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