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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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정말 깊게 잠에 들었다.
옥상으로 올라가니 형준이가 제일 먼저 나와있다.
형준은 어제 다른 무리에 섞여있던 청년인데, 알고 보니 나와 같은 대학교 후배다.
대한민국에서 이렇게 멀리 떨어진 곳에서
그리 크지도 않은 서울 소재의 대학교 동문을 만나다니
사람 인연은 정말 알 수 없다.
금방 운비와 로, 첵도 올라와서 함께 아침식사를 했다.
어제 선셋 포인트에서 만난 일본인 미오가 오늘 이 식당을 찾아오고 싶다고 했는데
과연 잘 찾아올 수 있을까 살짝 염려가 되었다.
시간이 지나자 밤새 유쾌하게 떠들썩하던 다른 일행들도 모두 하나둘씩 루프탑으로 올라왔다.
형준이는 곧 이 기묘한 인연의 선배에게 꾸벅 인사를 하더니 자신의 일행으로 돌아갔다.
해는 어느새 저만치 높이 올라가 보이는 모든 것을 뜨겁게 달구고 있었고,
옥상에서 우리들은 금세 또 저마다 각자의 매트리스에 널브러져 나름의 시간들을 보냈다.
나도 이 한가로운 시간을 이용해 오랜만에 책을 잡았다.
처음 한국에서부터 가져온 책은 태국 치앙마이 즈음해서 다 읽었고
그 책을 물물 교환해서 얻은 새로운 책을 읽고 있다.
나는 보통 여행을 하면 영문으로 된 책을 한 권 가지고 다니는데,
다 읽은 책은 현장에서 대게 다른 여행자들과 바꿔 읽는다.
원서인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고
다양한 국적의 여행자들과 ‘북 스와핑’(Book Swapping)을 하기 쉽도록 하기 위함이다.
내가 고른 책이 아니라 항상 새로운 독서가 되고, 또 도전이 된다.
물론 도중에 읽기를 포기해야 하는 책들도 몇 있었다.
지금 내 손에 들린 책은 ‘The World Is Flat’이란 책인데,
이번 여행과 묘하게 좋은 궁합이 되고 있다.
내가 누군가에게 건넨 책도 지금 그/그녀에게 좋은 동반자가 되고 있을까-
책도 읽고 음악도 듣고 수다도 조금씩 나누다가 석양 시간을 어림잡아 자이살메르 성을 향해 나섰다.
커다란 입구와는 달리 구불구불하게 난 성 안의 길을 따라 이리저리 다녀보았다.
조금 한적하다 싶으면 사람이, 또 조금 조용하다 싶으면 사람들이 끊임없이 보인다.
사막의 척박한 땅에서도 쉽게 도망치지 않고 이렇게 근사한 성(Castle)과 도시를 만들어 낸 사람들이 새삼 대단하게 보였다.
우리들은 오히려 삶에서 그렇게 많은 것들을 가지고도 자그마한 불편과 어려움으로부터 얼마나 쉽게 도망을 치는지- 라고 반성해본다.
인도에서 배운 힌디어는 부끄럽게도 몇 단어가 채 되지 않는데, 그래도 그중에 ‘도스트(친구)’와 ‘끼뜨나(얼마)’ 신공으로 눈에 들어온 옷을 몇 벌 샀다.
성 안의 게스트하우스 주인장들이 성 안으로 들어와서 지내는 것이 어떠냐고 유혹했다.
비수기라서 그런지 요금도 굉장히 저렴하게 주겠다고 한다.
옷가지가 든 봉지를 손에 달랑달랑 들고 타이타닉 숙소로 돌아왔다.
이내 깜깜한 밤이 되었고 형준이가 일행인 민희, 아영과 루프탑에 나타났다.
또 한밤을 시끄러운 수다와 호탕한 웃음으로 채운다.
타이타닉에 남기로 했다.
가장 큰 유혹은 언제나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