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금요일만 해도 아이들 주말 숙제를 꼭 봐줘야지 다짐하며 퇴근을 했다. 하지만 오늘도 역시나, 유치원에서 내준 아들의 주말 숙제를 안 했다는 걸 등원 길에 생각해냈다. 아이들과 관련해 챙겨야 할 것들은 어김없이 잊어버린다. 수첩에 적어놔도 수첩에 적었다는 것조차 잊는다.
웃긴 건, 13년 전 비행기에서 있었던 일은 그때의 감정과 상황까지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혼자 유럽으로 가는 여행길이었다. 언제나처럼 창가를 예약하고 앉아있는데 나랑 비슷한 연배의 남자분이 내 옆에 앉으셨다. 10시간 넘는 비행시간이었기에 그분이 먼저 자신의 신분도 밝히고 해외에 가는 이유가 뭔지 말씀해 주셨고, 다정한 분위기에 휩싸여 나도 나의 이야기를 조곤조곤하며 그렇게 몇 시간의 대화를 하게 됐다. 불이 꺼지고 잠시 눈을 붙였는데, 손에 감각이 없어지고 뭔가 묵직함이 느껴졌다. 잠에서 깨보니 비행기 안은 깜깜했고 모터 소리 말고는 정적이 흐르는 그 좁은 공간에서 내 옆자리의 그분이 내 손을 잡고 계셨다. 그때의 공포와 당혹스러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머뭇거리며 있는 힘껏 손을 빼려고 했지만, 눈을 감고 아무 힘도 쓰지 않는 듯한 그분을 힘으로 이기는 건 역부족이었다.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진땀만 흘렸던 그 순간을 나는 아직도 어제 일처럼 기억한다.
사실 그분이 무슨 얘기를 해주셨는지, 그리고 앞만 보고 얘기했기에 그분의 얼굴조차 기억이 나지 않는다. 오롯이 그때 느꼈던 당혹스러움과 공포감, 무력감만이 내 안에 남아있을 뿐이다.
기억에 대해 한 가지 더 얘기해보자면, 우리는 헤어진 상대와의 추억을 회상할 때면 좋았던 시간을 자주 떠올리곤 한다. 분명 안 좋아서 헤어졌을 텐데 말이다. 그때 그 사람과 왔던 이곳이 참 좋았는데, 나한테 이렇게 잘해줬었는데, 하면서 말이다. 내 머릿속에 남은 추억만 본다면 도대체 그 사람과 왜 헤어졌는지 이해가 안 될 정도다. 뇌는 그렇게 안 좋았던 추억은 빨리 망각하고, 좋았던 기억을 좀 더 오래 갖고 있는다 한다. 이럴 때 보면 참 좋은 뇌다.
지금 이 순간도 책을 읽고 그 내용을, 느낌을, 생각을 오래 간직하고자 이렇게 글을 쓴다. 나의 감정까지도 감각이라는 신경에 저장되어 뇌에 기록되어 있기에 분명 글로 써 놓는다면 더 오래 기억에 남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흐르면 책의 내용은 빠르게, 내 감정은 서서히 잊힐 것이다. 잊을 거면서 왜 이렇게 쓰고 있는 것일까.
그 이유조차 어딘가에 적어뒀던 거 같은데, 어디에 적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냥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이 너무 좋다,는 것 말고는 다른 건 잘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