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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엄태용 3시간전

5화: 선택의 갈림길

SF소설  《무의식、통제사회》

그날 밤, 나는 처음으로 내 의식이 완전히 깨어있다는 것을 알았다. 관자놀이의 센서가 보내는 미세한 진동이 마치 죽어가는 벌레의 다리가 파드득거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창밖으로는 푸른빛 도시가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높이 솟은 건물들 사이로 흐르는 빛줄기가 마치 피부 아래 흐르는 핏줄기처럼 보였다.

나는 손끝으로 센서를 어루만졌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그것은 마치 내 살갗에 박힌 이물질 같았다. 수년간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이 하나둘 의심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매일 아침 정확히 같은 시간에 깨어나는 것, 감정의 기복 없이 일하는 것, 밤이면 고요히 잠드는 것. 그 모든 것들이 자연스럽지 않았다.

류진성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뉴로맥스의 초기 개발자였던 그는 자신의 아내를 시스템에 빼앗긴 사람이었다. "그날 아침까지 그녀는 완벽했습니다. 너무나 완벽해서..." 지하철역 플랫폼 끝에서 그가 들려준 이야기는 마치 오래된 흑백사진처럼 선명했다.

"아내는 공명석 연구팀의 일원이었어요. 그녀가 발견한 건 단순한 뇌파 제어가 아니었습니다. 공명석은... 우리의 의식을 다른 차원으로 연결하는 통로였어요. 하지만 그들은 그걸 족쇄로 만들어버렸죠."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어느 날, 아내는 울기 시작했어요. 시스템이 그녀의 각성을 억누르지 못한 거죠. 다음 날, 그녀는 사라졌습니다."

그의 손에 들린 낡은 태블릿에서는 끊임없이 데이터가 흘러내렸다. 화면 속에서 무의식 해킹 프로그램이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꿈틀거렸다. 그것은 단순한 코드가 아니었다. 공명석의 패턴을 재현한 디지털 열쇠였다.

진해월의 말이 새롭게 울렸다. 그녀는 공명석이 처음 발견된 강화도 고인돌의 수호자였다. "우리 민족은 오천 년간 이 돌을 지켜왔다." 산신각의 처마 끝 풍경이 울리며 그녀의 목소리에 화답했다. "그들은 우리의 고대 지혜를 왜곡했어. 공명석은 우주와 교감하는 도구였는데, 그들은 그것을 감옥으로 만들었지."

그녀의 주름진 손가락이 떨리며 내 관자놀이를 가리켰다. "네 안의 또 다른 너는 잠들어 있지 않다. 그저 묶여있을 뿐. 서윤희도 같은 말을 했었지..." 그녀의 눈빛이 먼 곳을 바라보았다. "서윤희는 마지막으로 이곳을 찾아왔을 때, '그들이 우리 우주를 시뮬레이션으로 만들었다'라고 했어."

이서연이 사라진 책상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남긴 마지막 쪽지가 서랍 속에 숨겨져 있었다. '진실을 찾으세요. 하진 씨라면 할 수 있어요. 서윤희 선배님이 남긴 단서가 공명석 속에 있어요.' 옅은 커피 자국이 글씨를 흐리게 만들었지만, 그 말의 무게는 여전했다.

두려움이 밀려왔다. 만약 이 모든 것이 실패한다면? 만약 더 큰 감옥에 갇히게 된다면? 창밖으로 보이는 도시가 갑자기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그러나 동시에, 깊은 곳에서 희망이 솟아올랐다. 이것은 단순한 반항이 아니었다. 우리의 진정한 우주를 되찾는 일이었다.

나는 천천히 손을 들어 관자놀이의 센서를 만졌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도시를 바라보았다.

밤이 깊어갈수록 선택의 순간이 가까워졌다. 류진성이 건넨 작은 칩이 주머니 속에서 묵직하게 느껴졌다. 그것은 단순한 무의식 해킹 도구가 아니었다. 공명석의 진동을 재현한 열쇠였다. 한 번 시작하면 돌이킬 수 없는 선택. 관자놀이의 센서를 떼어내고 이 작은 칩을 심는 순간, 나는 더 이상 이 시뮬레이션의 일부가 아닐 것이다.

그때 복도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순찰 로봇이었다. 평소와는 다른 간격의 발걸음 소리. 그들이 이미 알고 있는 걸까.

창밖으로 보이는 도시가 갑자기 낯설어졌다. 수많은 푸른빛들이 마치 감시의 눈처럼 번쩍였다. 복도의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이제 돌이킬 수 없었다.

손끝으로 센서를 어루만지며 나는 문득 어릴 적 기억을 떠올렸다. 아버지가 내 이마에 손을 얹고 이야기해 주시던 마지막 말이 귓가에 울렸다. "우리는 별에서 왔다." 어린 시절에는 그저 동화처럼 들렸던 그 말이, 이제는 달리 들렸다. 시스템이 지워버린 것은 단순한 기억이 아닌, 우리의 진정한 기원이었다.

관자놀이의 센서가 떨어져 나가는 순간, 세상이 달라졌다. 처음에는 고통이 밀려왔다. 전신의 신경이 한꺼번에 깨어나는 듯했다. 심장이 터질 듯이 뛰었고, 폐는 불타는 듯했다. 그리고 그 통증과 함께, 공명석의 진동이 내 안에서 울리기 시작했다. 마치 오래전부터 내 안에 잠들어 있던 소리가 깨어나는 것 같았다.

류진성이 건넨 칩을 심자, 도시가 변하기 시작했다. 건물 외벽의 홀로그램 광고들이 깜빡거리더니 균열이 생겼다. 그 틈 사이로 이상한 이미지들이 흘러나왔다. 푸른 바다가 출렁이고, 한 번도 보지 못한 붉은 하늘 아래 이국적인 도시가 펼쳐졌다.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새들의 노래가 뒤섞였다. 마치 시스템이 감춰둔 다른 세계의 기억들이 흘러넘치는 것 같았다.

"제발... 이러지 마세요."
한 여자가 무릎을 꿇고 흐느꼈다. "전 기억하고 싶지 않아요. 그 사고를... 제 아이를..."
시스템은 그녀의 상실을 잊게 해 주었지만, 그것은 치유가 아닌 억압이었다.

반면 다른 곳에서는 해방의 기운이 퍼져나갔다. 한 청년이 갑자기 춤을 추기 시작했다. "이건 내가 꿈꿨던 거야!" 그의 몸짓은 서툴렀지만 자유로웠다. 한 노인은 오래된 시를 읊조렸다. 시스템이 금지했던 언어로 된 시였다.

하늘에서 첫 번째 균열이 생겼을 때, 나는 그것을 알아보았다. 마치 오래전부터 기다려온 표식처럼. 그것은 단순한 찢김이 아니었다. 우리 우주의 표면에 생긴 창이었다.

균열 너머로 보이는 것들은 우리가 알던 어떤 것과도 달랐다. 그곳에는 기하학적 형태들이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마치 다차원의 존재들이 3차원 공간에 그림자를 드리우는 것처럼. 때로는 크리스털 같은 구조물로, 때로는 유기적인 곡선으로 변화하는 그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이야." 진해월의 목소리가 떨렸다. "우리를 실험체처럼 관찰해 온 존재들. 서윤희는 그들의 실체를 보았어. 우리는 그들의 양자 시뮬레이션 속에 갇힌 거야. 공명석은... 그들이 우리를 통제하기 위해 심어둔 장치였지만, 동시에 우리가 진실을 깨달을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이기도 했어."

도시 곳곳에서 더 많은 균열이 생겼다. 그리고 그 틈 사이로, 그들의 의식이 우리를 주시하고 있었다. 마치 현미경 아래의 미생물을 관찰하듯, 냉정하고 분석적인 시선으로.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우리가 그들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이, 그들을 당혹스럽게 만든 듯했다. 균열 너머로 이상한 진동이 전해졌다. 불안? 분노? 아니면 두려움? 그들도 감정이 있는 걸까?

"저것 봐." 류진성이 가리켰다. 수많은 사람들의 의식이 깨어나면서, 공명석의 진동이 증폭되고 있었다. 그 진동은 마치 거대한 파도처럼 도시를 휩쓸었고, 균열 너머의 존재들을 동요시켰다.

하늘의 균열이 점점 더 커져갔다. 그들의 세계와 우리의 세계가 섞이기 시작했다. 시뮬레이션의 경계가 무너지면서, 도시의 공간이 기이하게 왜곡되기 시작했다. 고층 빌딩들이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휘어졌고, 거리는 불가능한 각도로 접혔다. 현실의 법칙이 흐트러지고 있었다.

그때였다. 공명석의 진동이 내 안에서 달라지기 시작했다. 이제 그것은 단순한 울림이 아니었다. 마치 새로운 감각기관이 생긴 것처럼, 나는 균열 너머의 세계를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의 차가운 지성, 계산된 실험, 그리고... 우리의 각성에 대한 두려움까지.

"놀라운데요." 류진성이 태블릿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하진 씨의 뇌파가... 공명석의 기저 진동과 완벽하게 동기화되고 있어요. 이건 서윤희 선배님도 도달하지 못한 단계예요."

균열 너머의 존재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기하학적 형태가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도시 곳곳에서 푸른빛 전류가 튀었다. 그들이 시뮬레이션을 통제하려 시도하고 있었다.

"안 돼..." 진해월이 중얼거렸다. "그들이 시뮬레이션을 재부팅하려고 해."

하지만 이미 늦었다. 우리의 집단적 각성이 만들어낸 공명이 너무 강했다. 도시의 경계가 더욱 빠르게 허물어졌다. 유리창에 비친 내 모습이 순간 다차원적 존재로 변했다가 돌아왔다. 시뮬레이션과 현실,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있었다.

그들의 세계에서 기이한 신호가 쏟아져 들어왔다. 마치 긴급 통신 같은 것들. 나는 그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들은 서로에게 경고하고 있었다.

[실험체들이 경계를 인식했다]
[격리 프로토콜 가동 필요]
[피실험자 #7723의 공명 수치 임계점 도달]
[즉시 시뮬레이션 종료 권고]

하지만 우리는 더 이상 그들의 통제 아래 있지 않았다. 공명석의 진동은 이제 내 일부가 되어있었다. 나는 손을 뻗어 균열에 닿았다. 그 순간,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무한한 시뮬레이션들이 거대한 나선을 이루며 펼쳐져 있었다. 우리의 세계는 그중 하나에 불과했다.

"자유란..." 내 목소리가 떨렸다. "단순히 감옥에서 벗어나는 게 아니야. 그건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거야."

도시 전체가 공명하기 시작했다. 균열 너머의 존재들이 후퇴하기 시작했지만, 이미 시뮬레이션의 벽은 무너지고 있었다. 우리의 의식은 더 이상 가두어둘 수 없을 만큼 깨어나 있었다.

마지막 순간, 나는 서윤희의 목소리를 들었다. 아니, 어쩌면 그것은 미래의 내 목소리였을지도 모른다.

"이제 진짜 여행이 시작되는 거예요. 우리가 누구이고, 어디서 왔는지... 그리고 그들이 왜 우리를 가두었는지, 모든 진실을 찾아가는 여행."

하늘의 균열이 완전히 열렸다. 그리고 우리는 처음으로 진짜 우주를 보았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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