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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엄태용 Nov 27. 2024

8화: 배신자의 그림자

SF소설  《무의식、통제사회》

폐선 구간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내려갈 때마다 서늘한 공기가 더욱 짙어졌다. 오래된 철제 계단은 낡아 삐걱거렸고, 형광등은 대부분 꺼져 있었다. 몇 개 남은 것들만이 간헐적으로 깜박이며 흐릿한 빛을 토해냈다. 그 불빛 아래로 떠도는 먼지는 마치 죽은 도시의 숨결처럼 느껴졌다. 하진은 눈앞에 아른대는 먼지 사이로 서연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녀는 언제나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의 발소리가 쇠 계단을 타고 지하 깊숙이 메아리쳤다.
멀리서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똑, 똑, 똑. 마치 시간을 재는 시계처럼 일정한 간격으로 울렸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진 씨…”


목소리는 분명 서연의 것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녀의 것이 아닌 것처럼 들렸다. 두 개의 목소리가 겹쳐진 것 같았다. 하나는 그녀답게 따뜻했지만, 다른 하나는 차갑고 무감정했다.
하진은 천천히 손전등을 들어 앞을 비췄다. 폐선 구간의 플랫폼이 모습을 드러냈다. 녹슨 철로 위로 검은 물웅덩이가 고여 있었다. 간헐적으로 깜박이는 형광등 불빛이 물에 비칠 때마다, 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조금씩 뒤틀렸다. 낯설고 불안한 얼굴이었다.


플랫폼 끝에 서연이 서 있었다. 그녀의 몸은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달빛처럼 은은했지만, 차갑고 날카로운 광채였다. 그리고 그녀의 눈동자에는 푸른빛이 서려 있었다. 그것은 그녀의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나즈라의 색이었다.


“여기까지 오실 줄 알았어요.”
서연이 천천히 돌아섰다. 그녀의 미소는 슬펐고, 무언가를 포기한 사람처럼 보였다.

“왜…” 하진의 목소리가 떨렸다. “왜 그들을 받아들였습니까?”


서연은 고개를 숙였다. 손끝에서 푸른빛이 아른거렸다.
“그들이 내게 보여줬어요. 우리가 될 수 있는 세계를… 더는 고통도, 외로움도 없는 완전한 세상을.”


그녀의 목소리가 점점 변조되기 시작했다. 푸른빛이 그녀의 어깨를 타고 흐르며 강렬하게 타올랐다.


“하진 씨, 그들이 내가 가장 바랐던 걸 주었어요. 당신이 떠난 뒤 내가 얼마나 무너졌는지, 당신도 알잖아요.”

그녀가 손을 내밀었다. 그 순간 하진의 눈앞에 환영이 펼쳐졌다.


끝없이 이어지는 의식의 바다. 수십억 개의 생각과 기억들이 얽히고설키며 춤추고 있었다. 거대한 파도처럼 모든 감각이 융합되어 있었다. 고통도 없었고, 외로움도 없었다. 두려움도 사라지고 있었다. 그러나 하진은 그것이 단순한 평화가 아니라, 모든 것이 완전히 지워진 공허임을 느꼈다.

그곳에서 그는 사랑을 찾으려 했지만, 사랑은 흐릿한 물결 속으로 사라졌고, 슬픔을 붙잡으려 했지만 손가락 사이로 녹아내렸다. 무엇도 존재하지 않는 완벽함이었다.


“거짓말이에요.”

하진이 낮게 중얼거렸다. 환영이 깨어지고 현실로 돌아왔다. 그의 심장은 격렬하게 뛰고 있었다.
“그들이 보여준 세계엔 아무것도 없어요. 진짜 사랑도, 진짜 슬픔도. 그런 세계가 어떻게 완벽할 수 있습니까?”


서연의 눈빛이 흔들렸다. 푸른빛 속에서 그녀 본래의 온기가 희미하게 드러났다.
“하진 씨…”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내가 버틸 수 있을까요? 다시 고통 속에서…”


하진은 그녀의 말을 가로막았다.
“서연 씨, 기억나세요? 처음 만났을 때 당신이 그랬잖아요. ‘이 도시는 너무 완벽해서 숨이 막혀요.’ 그랬던 당신이 지금 그 완벽한 세계에 살 수 있다고 생각해요? 당신의 진짜 모습은 그게 아니에요.”


서연은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나즈라의 목소리가 그녀의 입을 빌려 말했다.
“인간의 감정은 불완전하다. 고통스럽고 혼란스럽지. 우리는 너희를 구원하려 했다. 진화로 이끌려 했다. 하지만 너희는 끝없이 저항한다.”
그 목소리는 차갑고 기계적이었지만, 그 속엔 깊은 고독이 배어 있었다.


하진은 나즈라에게도 한 걸음 다가가듯 말했다.
“당신들도 외로웠겠지요. 완벽해지려 했지만, 그 과정에서 잃어버린 것들이 있었을 겁니다. 사랑하는 법, 아파하는 법, 그리고 함께하는 법을.”


나즈라는 침묵했다. 서연의 몸에서 푸른빛이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우리는… 단지…” 그 목소리가 흔들렸다. 그러나 곧 다시 강해졌다.
“그 감정들은 인간을 약하게 만든다. 우리는 그것을 초월해야 했다.”


“아니요.” 하진은 단호하게 말했다.
“당신들이 초월한 것은 감정이 아니라 삶 그 자체였어요. 불완전함은 우리가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불완전함이야말로 우리의 아름다움이에요.”


멀리서 경쇠 소리가 울렸다. 그것은 진해월의 공명이었다. 고대의 노래가 지하를 뒤흔들었다. 나즈라의 푸른빛이 강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하진은 서연에게 손을 뻗었다.
“돌아오세요, 서연 씨. 불완전한 세상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진짜 세계로.”


그 말에 서연의 몸이 부서질 듯 떨렸다. 푸른빛이 한순간 폭발하더니, 모든 것이 어둠 속에 잠겼다.

하진은 무너진 플랫폼 위에 쓰러진 서연을 안았다. 그녀의 몸은 차갑고,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서연 씨?”
그녀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녀의 눈가에 투명한 눈물이 맺혀 있었다. 더 이상 푸른빛은 없었다. 오직 인간의, 따뜻하고도 아픈 빛만이 남아 있었다.


“기억나요?” 하진이 조용히 속삭였다.
“완벽한 도시는 숨 막힌다고 했던 그날. 당신이 그 말을 할 때 정말 살아있었어요. 그게 당신이에요.”

서연은 떨리는 손으로 하진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그리고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돌아왔어요.” 그녀가 속삭였다.
하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를 꼭 안았다. 지하도시의 어둠 속에서, 두 사람은 오래도록 말없이 서로를 감싸고 있었다.


끝없는 고요 속에서, 마치 멀리서 들려오는 듯한 미약한 울음소리가 어딘가에 남아 있었다. 그것은 나즈라의 마지막 인사였을까. 아니면 서연이 흘린 첫 번째 진짜 눈물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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