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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엄태용 Dec 08. 2024

14화: 불의 숨결

SF소설  《무의식、통제사회》

어둠이 짙어질 때마다 바다는 깊어졌다. 제주로 향하는 배 위에서 나는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파도가 철썩이며 부서질 때마다 하얀 포말이 일었다. 그 모양이 마치 공명석의 나선형 무늬 같기도 했다. 서연은 난간에 기대어 섰다. 그녀의 검은 머리칼이 바닷바람에 나부꼈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침묵을 안고 있었다.

"성산에 도착하면 해가 뜰 거예요."


류진성이 태블릿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화면 속에는 김선주 박사가 보낸 암호화된 좌표가 깜박이고 있었다. 그는 피곤한 얼굴로 고개를 들어 어둠 속의 섬을 바라보았다.

"할머니는 늘 말씀하셨어요."


진해월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그녀는 배 뒤편에서 조용히 염주를 돌리고 있었다.


"이 땅의 화산은 잠들어 있지 않다고. 그저 숨 쉬고 있을 뿐이라고."

나는 주머니 속의 어머니 일기장을 만졌다. 마지막 페이지에 그려진 지도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성산 지하 동굴의 가장 깊은 곳. 그곳에서 김선주 박사가 발견했다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밤바다의 공기가 차가웠다. 서연이 몸을 떨었다. 그녀의 관자놀이 흉터가 달빛에 희미하게 반짝였다. 나는 그녀에게 다가가 외투를 걸쳐주었다. 그 순간 우리의 그림자가 갑판 위에서 하나로 겹쳐졌다.

"기억나요?" 서연이 속삭였다. "처음 만났을 때, 당신은 실험체 A-274였고, 저는 B-391이었죠. 우리는 서로의 이름도 몰랐어요."

침묵이 잠시 이어졌다. 멀리서 파도 소리만이 들려왔다.

"때로는 궁금해요."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가 깨어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그저 숫자로 남아있었다면..."

그때였다. 갑자기 서연의 몸이 굳어졌다. 그녀의 눈동자가 흐려지더니 이내 푸른빛을 띠기 시작했다. 나즈라의 잔상이었다.

"서연 씨!"


내가 그녀를 붙잡았다. 그녀의 몸이 차가웠다. 마치 한겨울 바다처럼.

"보여요..."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김선주 박사가 본 것이... 성산의 지하에서..."

그녀의 말은 끊겼지만, 나는 느낄 수 있었다. 그녀의 떨림을 통해 전해지는 무언가를. 나즈라의 의식이 남긴 잔상 속에서 그녀는 무언가를 보고 있었다.

류진성이 재빨리 다가와 서연의 뇌파를 확인했다. 그의 표정이 굳어졌다.


"이건... 공명석의 진동과 일치합니다. 하지만 더 강렬해요. 마치 근원적인..."

진해월이 조용히 다가왔다. 그녀의 손에 든 염주가 이상하게 떨리고 있었다.
"저것 봐." 그녀가 수평선 너머를 가리켰다.

우리 모두 그곳을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어둠뿐이었다. 하지만 점차 무언가가 달라지고 있었다. 수평선 위로 희미한 빛이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태양이 아니었다. 섬 전체가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할머니 말씀이 맞았어." 진해월의 목소리가 떨렸다.
"화산은 죽지 않았다. 그저 잠들어 있었을 뿐. 그리고 그 아래에서... 우리의 모든 기억이 깨어나고 있어."

서연의 몸에서 푸른빛이 사그라들었다. 대신 그녀의 눈동자에는 이상한 빛이 맺혔다.


"나즈라가 이 땅을 선택한 이유..." 그녀가 힘겹게 말을 이었다. "그들은 알고 있었어요. 이곳이... 최초의 공명이 시작된 곳이라는 걸."

배가 천천히 섬을 향해 다가갔다. 성산의 윤곽이 조금씩 선명해졌다. 그리고 우리는 보았다. 일출봉의 분화구를 따라 희미하게 퍼져나가는 나선형의 빛을. 그것은 마치 거대한 공명석의 문양 같았다.

우리의 여정은 이제 시작이었다. 이 섬의 가장 깊은 곳에서, 우리는 마주하게 될 것이다. 나즈라가 그토록 두려워했던 진실을. 그리고 어쩌면 우리 자신의 본질도.

어둠 속에서 파도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마치 오래된 기도처럼, 끝없이 반복되는 숨소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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