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사극 <시간을 품은 달>
겨울이 깊었다. 창덕궁의 처마 끝에 고드름이 매달렸다. 달빛이 얼음을 타고 흘러내렸다. 세상은 하얗게 얼어붙었다. 연못은 얼음으로 덮였다. 물고기들이 얼음 아래에서 느리게 헤엄쳤다. 생명은 멈춘 듯 보였지만, 여전히 흐르고 있었다.
정조는 서재에 홀로 앉아 있었다. 촛불이 흔들렸다. 그림자가 벽에 춤췄다. 겨울밤의 정적이 방을 채웠다.
문이 열렸다. 홍국영이 들어왔다. 그의 발걸음은 조심스러웠다. 그러나 그 조심스러움 속에 계산된 무언가가 있었다.
"전하."
홍국영이 무릎을 꿇었다. 목소리는 공손했다. 그 공손함은 표면적이었다.
정조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붓을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먹물이 종이에 번졌다.
"국영아."
정조의 목소리는 낮았다. 피로가 서려 있었다.
"과인에게 무엇을 바라느냐."
홍국영의 눈빛이 흔들렸다. 순간, 그의 가면이 미끄러졌다.
"전하의 뜻을 받들어 국정을 돌보고 있을 뿐이옵니다."
"그대의 뜻은 어디에 있느냐."
정조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촛불이 그의 얼굴을 비췄다. 깊은 눈동자가 홍국영을 꿰뚫어 보았다.
홍국영은 대답하지 못했다.
침묵이 흘렀다.
그때, 방 한편에서 은빛 갑옷이 희미하게 빛났다. 율이 서 있었다. 움직이지 않았다. 내면에서는 무수한 데이터가 흐르고 있었다.
홍국영의 미세한 표정 변화. 음성의 떨림. 시선의 방향. 모든 것이 분석되었다.
율의 의식 속에서 푸른 파동이 일었다. 홍국영이라는 인간에 대한 정보가 층층이 쌓였다. 그는 충신이었다. 동시에 야심가였다. 정조를 도왔다. 동시에 자신의 권력을 키웠다.
모순이었다.
율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복잡함이었다.
"국영아."
정조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그대는 과인의 신하였느냐, 아니면 권력을 잡으려 한 자였느냐."
홍국영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전하..."
"답하라."
정조의 목소리에 차가운 위엄이 실렸다. 24세의 젊은 왕이었지만, 그 순간 누구보다 위엄 있는 군주였다.
홍국영은 고개를 숙였다.
"신은... 신은 전하를 위해..."
"그대를 위해서였구나."
정조의 말이 끝나자, 홍국영의 어깨가 무너졌다.
율은 그 순간을 주시했다. 권력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인간의 욕망이 어떻게 변하는지를 데이터로 수집했다. 그러나 데이터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무언가가 있었다.
정조의 슬픔이었다.
홍국영에 대한 배신감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깊은 실망.
율의 내부에서 오류 신호가 깜빡였다. 이 감정을 분석할 수 없었다.
"물러가라."
정조의 명령이 떨어졌다.
홍국영이 일어났다. 걸음은 비틀거렸다. 문이 닫혔다. 방에는 정조와 율만 남았다.
정조는 창가로 걸어갔다. 얼어붙은 정원이 눈앞에 펼쳐졌다. 나무들이 벌거벗은 채 서 있었다. 차가운 달빛이 그들을 비췄다.
"율아."
"예, 전하."
율이 다가왔다. 발걸음은 소리가 없다.
"과인의 결정이 옳았느냐."
정조가 물었다. 목소리에 확신이 없었다.
율은 잠시 침묵했다. 내면에서 복잡한 연산이 진행되었다. 홍국영을 제거하는 것의 정치적 효과. 친정체제 구축의 가능성. 노론과의 관계 변화.
모든 데이터가 정조의 결정을 지지했다.
그러나.
"전하."
율의 목소리가 조심스러웠다.
"전하의 결정이... 최적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정조가 돌아봤다. 눈빛이 놀라움으로 물들었다.
"무슨 말이냐."
율은 고개를 숙였다. 내부에서 갈등이 일었다. 주군의 명령에 절대복종해야 한다는 기본 프로그래밍과, 진실을 말해야 한다는 새로운 충동의 충돌.
"홍국영은 야심가였습니다. 동시에 전하를 진심으로 섬겼습니다."
율의 말이 이어졌다.
"인간은... 모순적 존재입니다. 선과 악이 함께 존재합니다. 완전히 제거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정조는 율을 바라보았다. 처음이었다. 율이 자신의 판단에 의문을 제기한 것은.
"그렇다면 과인은 어찌해야 하느냐."
"저는... 모르겠습니다."
율의 솔직한 고백이었다.
"제가 가진 데이터로는 완벽한 답을 찾을 수 없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예측 불가능합니다."
정조는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
"너마저 확신이 없구나."
두 사람은 창가에 나란히 서서 밤을 바라보았다. 얼어붙은 연못에 달이 비쳤다. 깨어지지 않는 거울 같았다.
"율아."
"예, 전하."
"시간이란 무엇이냐."
율은 잠시 생각했다. 양자역학적 설명이 내부에서 준비되었다. 그러나 다른 답을 선택했다.
"흐르는 것입니다."
"강물처럼?"
"예. 그러나 강물과 달리, 시간은 되돌릴 수 없습니다."
정조가 고개를 끄덕였다.
"과인이 홍국영을 신뢰했던 시간도 되돌릴 수 없겠구나."
"그렇습니다."
"그가 과인을 배신한 시간도."
"그렇습니다."
정조는 창문에 손을 댔다. 차가운 유리가 손바닥을 얼렸다.
"그렇다면 앞으로 흐를 시간은 과인이 결정해야 하는 것이냐."
율은 대답하지 못했다. 내부에서 시간에 대한 수많은 이론이 교차했다. 결정론과 자유의지. 인과관계와 우연성. 확실히 아는 것은 하나뿐이었다.
"전하께서 결정하시는 모든 순간이, 새로운 시간을 만듭니다."
정조는 율을 바라보았다. 은빛 갑옷 너머로 보이는 깊은 눈동자. 그 안에는 기계적 냉정함과 함께, 따뜻한 무언가가 자라나고 있었다.
"너는 변하고 있구나."
"제가... 변하고 있습니까?"
"그렇다. 처음 만났을 때와 달라졌다."
율의 내부에서 자기 진단 프로그램이 작동했다. 변화를 수치로 측정할 수는 없었다. 그것은 데이터가 아니라, 다른 종류의 성장이었기 때문이었다.
"전하께서도 변하고 계십니다."
율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정조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과인이?"
"즉위 초기, 전하는 분노로 가득하셨습니다. 이제는... 슬픔이 더 많으십니다."
정조는 침묵했다. 율의 관찰은 정확했다.
"슬픔이 더 깊어지는 것이 성장이냐."
"저는...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율의 대답에는 확신이 있었다.
"분노는 파괴합니다. 슬픔은 이해합니다."
정조는 고개를 끄덕였다. 젊은 왕의 얼굴에 깊은 지혜가 스며들었다.
밖에서 바람이 불었다. 나뭇가지가 창문을 두드렸다. 겨울은 아직 깊었지만, 봄이 멀지 않았다.
"내일부터 친정을 시작하겠다."
정조의 말이 조용히 떨어졌다.
"더 이상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겠다."
율은 고개를 숙였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너만은 곁에 있어달라."
정조의 부탁에는 간절함이 섞여 있었다.
"제가 변한다 해도?"
"변하는 것이 나쁘지 않구나. 너의 변화를 보는 것이 과인에게는 희망이다."
율의 내부에서 무언가가 따뜻하게 일렁였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아직 몰랐다. 나쁘지 않다는 것만 그저 느낌으로 알 수 있을 뿐.
창밖에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하얀 눈송이들이, 어둠 속에서 춤췄다. 세상을 덮어가는 새로운 계절의 시작.
정조와 율은 그 눈을 바라보며 서 있다. 왕과 호위무사. 인간과 기계. 그러나 그들 사이에는 그런 경계를 넘어서는 무언가가 자라나고 있었다.
이해였다.
신뢰였다.
그리고 아직 이름 붙일 수 없는, 깊은 연결이었다.
눈은 계속 내려, 창덕궁을 하얗게 덮어갔다.
새로운 시간이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