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사극 《시간을 품은 달》
창덕궁의 지붕 위로 하얀 꽃송이들이 조용히 앉았다. 세상이 고요했다. 소리마저 눈에 묻혀 사라졌다. 기와 끝에 매달린 고드름이 달빛을 받아 푸르게 빛났다. 차가운 아름다움.
정조는 서재에 홀로 앉아 있었다. 촛불이 흔들렸다. 손끝이 떨렸다. 종이 위에 먹이 번졌다. 검은 점이 퍼져나갔다. 마치 분노처럼.
"죽여라." 낮은 목소리였다. 그 말이 떨어지자 방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율은 정조 뒤편에 서 있었다. 은빛 갑옷이 촛불빛에 일렁였다.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눈동자만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전하."
"짐의 명을 들었느냐."
정조가 고개를 돌렸다. 그 눈빛에는 차가운 분노가 서려 있었다. 사도세자의 죽음. 끝없는 암살 시도. 노론의 음모. 모든 것이 그 눈빛 안에 응축되어 있었다.
"김종수의 자객들을 모두 찾아내어 죽여라. 한 명도 남기지 말거라." 율의 내면에서 파동이 일었다. 푸른빛이 스쳤다가 사라졌다. 데이터가 급류처럼 흘렀다.
[ 명령 분석 중. 대상: 노론 자객 17명. 요구사항: 완전 제거. 충돌 감지.]
율의 시스템 깊숙한 곳에서 경고음이 울렸다. 붉은 신호가 번쩍였다.
[프로토콜 1: 인간 생명 보호. 프로토콜 2: 주군 명령 수행. 상충 발생.]
"전하."
율의 목소리가 굳어있었다. 평소의 차분함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제가... 생명을 해치는 것은."
"무엇이냐."
정조의 목소리에 날카로움이 스며들었다. 촛불이 더욱 격하게 흔들렸다. 그림자가 벽에 춤췄다.
율은 침묵했다. 내부에서 수많은 연산이 진행되었다. 미래의 창조자들이 입력한 윤리 코드. 생명의 존엄성. 살인 금지. 그 모든 것이 주군에 대한 충성과 맞부딪혔다.
"짐이 명하는 것이다."
정조가 일어났다. 키가 크고 단정한 몸매가 촛불에 길게 그림자를 드리웠다. 왕의 위엄이 서재를 가득 채웠다.
"네가 짐의 호위무사가 아니냐. 짐의 명을 따르는 것이 당연하지 않으냐." 율의 눈동자가 푸르게 빛났다.
일순간이었다. 빛이 깜빡이자마자 사라졌다.
내가 누구의 명령을 따라야 하는가.
미래의 창조자인가. 현재의 주군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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