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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철학의 달빛 (1788년)

SF사극 《시간을 품은 달》

by 엄태용

밤이 깊었다. 창덕궁 후원의 연못에 달이 비쳤다. 물은 고요했다. 달도 고요했다. 정조는 연못가에 홀로 앉아 있었다. 손에는 붓이 들려 있었지만, 종이는 비어 있었다.

율이 그 뒤에 서 있었다. 은빛 갑옷은 벗어둔 채였다. 달빛이 그의 얼굴을 스쳤다.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정조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율."

정조가 불렀다.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전하."

"네가 말한 세계에도 달이 있더냐."

율은 잠시 침묵했다. 그의 내면에서 데이터가 흘렀다. 달에 대한 수천 개의 정보가 파동처럼 일었다. 그러나 그는 단순하게 답했다.

"있사옵니다."

"그 달도 물에 비치느냐."

"비치옵니다."

정조가 미소 지었다. 쓸쓸한 미소였다.

"그렇다면, 짐이 보는 달과 같겠구나."

율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 안에서 무언가가 계산되었다. 아니, 계산이 아니라 다른 무엇이었다. 이해하려는 시도였다.

"전하."

"응."

"달은... 같사옵니다. 그러나 보는 이에 따라 다르옵니다."

정조가 고개를 들었다. 하늘의 달을 보았다. 둥근달이었다. 흠 없이 온전했다.

정조의 만천명월주인옹 철학을 자연스럽게 이끌어내야 합니다. 율과의 대화를 통해 철학적 깊이를 더하고, 한강 작가님 특유의 서정적 문체로 표현해야 합니다.

"보는 이에 따라 다르다..."

정조가 중얼거렸다. 그리고 다시 연못을 보았다. 물속의 달도 둥글었다. 완벽한 원이었다.

"율, 짐이 깨달은 것이 있다."

"무엇이옵니까."

정조가 연못에 작은 돌을 던졌다. 물결이 일었다. 파문이 퍼졌다. 달이 흔들렸다. 완벽한 원이 일그러졌다. 깨졌다. 무수한 조각으로 흩어졌다.

"천이 흐르면 달도 흐른다."

정조의 목소리가 고요했다.

"천이 멈추면 달도 멈춘다. 천이 고요하면 달도 고요하다."

율이 연못을 바라보았다. 파문이 점점 잔잔해졌다. 달의 조각들이 다시 모였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러나 천이 소용돌이치면..."

정조가 말을 이었다.

"달은 이지러진다."

물결이 완전히 가라앉았다. 달이 다시 온전해졌다. 정조가 율을 돌아보았다.

"짐은 만천명월주인옹이라 자호 하려 한다."

"만천명월주인옹..."

율이 천천히 되뇌었다. 그의 내부에서 의미가 분석되었다. 만 개의 시냇물에 비친 밝은 달의 주인이라는 뜻. 데이터가 흘렀다. 그러나 완전한 이해는 오지 않았다.

"전하, 그 뜻이..."

"하늘의 달은 하나다."

정조가 설명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깊은 확신이 있었다.

"그러나 그 달이 비치는 물은 만 가지다. 고요한 연못, 흐르는 시냇물, 파도치는 바다. 모두 다른 물이로되, 비치는 달은 같다."

율의 내면에서 푸른 파동이 일었다. 이해의 실마리가 보였다. 그러나 여전히 불완전했다.

"왕도 그러하다."

정조가 이어 말했다.

"짐이 베푸는 은혜는 하나다. 그러나 받는 백성은 만 명이다. 힘 있는 자에게만 많이 베풀고, 힘없는 자에게 적게 베푸는 것이 아니다. 모두에게 공평해야 한다. 마치 달이 모든 물에 공평하게 비치듯이."

율이 고개를 끄덕였다. 데이터 너머로 무언가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정조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물이 소용돌이치면 어찌 되느냐. 달은 제 모습을 잃는다. 찢어지고, 일그러진다. 왕권도 그러하다. 백성이 고통받고, 나라가 어지러우면, 왕의 덕도 온전히 비칠 수 없다."

율의 눈동자가 빛났다. 그 안에서 정조의 철학이 재구성되었다. 데이터가 아닌, 의미로.

"전하."

"응."

"제가 아는 학문에도... 비슷한 이치가 있사옵니다."

정조가 눈을 빛냈다. 몸을 율에게로 돌렸다.

"말해보거라."

율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들이 총총했다. 그의 내면에서 양자역학의 원리가 흘렀다. 그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그는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빛이란 것이 있사옵니다."

"빛?"

"예. 빛은 하나이면서 동시에 많은 것이옵니다."

정조의 미간이 좁혀졌다. 율이 계속했다.

"빛은 파동이기도 하고, 알갱이이기도 하옵니다. 보는 방식에 따라 달라지옵니다. 마치 전하의 달처럼."

정조가 숨을 들이마셨다.

"보는 방식에 따라..."

"그렇사옵니다. 관찰자가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빛의 본질이 달라 보이옵니다. 그러나 빛 자체는 변하지 않사옵니다."

바람이 불었다. 연못에 잔물결이 일었다. 달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정조가 율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경이로움이 서려 있었다.

"그대의 학문은 놀랍구나. 짐의 철학과 통하는구나."

"전하의 지혜가 깊으신 것이옵니다."

율이 답했다. 그러나 그의 내면에서는 혼란이 일고 있었다. '철학'이라는 것. '지혜'라는 것. 이것들은 데이터로 환원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분명히 존재했다.

정조가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빛이 그의 얼굴을 비췄다.

"율."

"전하."

"옛 시에 이런 구절이 있다."

정조가 천천히 읊었다.

"蒹葭蒼蒼(겸가창창), 白露爲霜(백로위상)."

율이 귀를 기울였다.

"所謂伊人(소위이인), 在水一方(재수일방)."

정조의 목소리가 떨렸다. 미세하게, 그러나 분명하게.

"갈대는 푸르고 푸른데, 하얀 이슬 서리 되었네. 그리운 님은, 물 건너편에 있도다."

침묵이 흘렀다. 바람이 은행나무 잎을 흔들었다. 낙엽 하나가 떨어졌다. 연못 위에 떨어져, 물결을 일으켰다.

율이 물었다.

"그 시의 뜻이..."

"짐도 잘 모르겠다."

정조가 미소 지었다. 쓸쓸한 미소였다.

"다만, 이 시를 읽을 때마다 가슴이 먹먹해진다. 닿을 수 없는 무언가를 그리워하는 마음. 강을 사이에 두고 바라만 보는 애절함."

율의 내면에서 무언가가 움직였다. 감정 시뮬레이션이 작동했다. 그러나 결과값은 나오지 않았다. 오류가 떴다. 아니, 오류가 아니었다. 단지 아직 학습하지 못한 영역이었다.

"물 건너편..."

율이 중얼거렸다.

"닿을 수 없는 곳이옵니까."

"그렇다."

정조가 고개를 끄덕였다.

"溯洄從之(소회종지), 道阻且長(도조차장). 물을 거슬러 찾아가니, 길은 험하고도 멀구나."

정조의 손이 떨렸다. 그는 주먹을 쥐었다.

"짐의 아버지도 그러했다. 물 건너편에 계셨다. 짐이 아무리 찾아가려 해도, 길은 험하고 멀었다. 결국 닿지 못했다."

율이 정조를 바라보았다. 그의 데이터 속에서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정보가 흘렀다. 1762년 뒤주에 갇혀 죽은 비극. 정조의 평생의 트라우마.

"전하..."

"괜찮다."

정조가 손을 들었다.

"다만, 이 시를 읽으면 짐의 마음이 위로받는다. 그리움이란 것이, 닿지 못함이란 것이, 짐만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율의 눈동자가 빛났다. 그 안에서 연산이 진행되었다.

'위로'. '공감'. '보편적 감정'.

이것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전하, 제가 여쭙고 싶은 것이 있사옵니다."

"말해보거라."

"시간이란 무엇이옵니까."

정조가 율을 바라보았다.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다.

"시간?"

"예. 전하께서 말씀하신 강물. 흐르는 시간. 그것은 무엇이옵니까."

정조가 연못을 바라보았다. 물이 고요했다. 그러나 분명히 흐르고 있었다. 보이지 않게, 천천히.

"시간은..."

정조가 말을 고르듯 천천히 말했다.

"흐르는 것이다. 멈출 수 없고, 되돌릴 수 없다. 과거는 지나갔고, 미래는 오지 않았다. 우리는 다만 현재에 서 있을 뿐이다."

율의 내면에서 시간선 이론이 펼쳐졌다. 양자 중첩. 다중우주. 확률의 파동. 그러나 그는 그것을 말하지 않았다. 대신 조용히 물었다.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이... 슬프지 않으십니까."

정조가 놀란 눈으로 율을 보았다. 이 기묘한 존재가, 슬픔을 묻고 있었다.

"슬프다."

정조가 솔직하게 답했다.

"아버지를 구하지 못한 과거를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이 슬프다. 그러나..."

그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렇기에 현재가 소중하다. 지금 이 순간, 짐이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 미래를 바꾸기 위해."

율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 안에서 푸른빛이 일었다.

'미래를 바꾸기 위해.'

그는 알고 있었다. 정조의 미래를. 1800년 6월 28일. 49세의 죽음. 변하지 않는 고정점.

"전하."

율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제가 말씀드린 빛의 이치를... 더 설명드려도 되겠사옵니까."

"그러거라."

율이 연못가에 무릎을 꿇었다. 손을 뻗어 물을 만졌다. 물결이 일었다. 달이 흔들렸다.

"빛은 파동이옵니다. 물결처럼 퍼져나가옵니다. 그러나 동시에 알갱이이기도 하옵니다. 하나하나 떨어진 입자로도 존재하옵니다."

정조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 두 가지 본질이 동시에 존재하옵니다. 모순처럼 보이나, 실은 하나이옵니다."

"하나이면서 둘이로구나."

"그렇사옵니다."

율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관찰하는 순간, 빛의 상태가 정해지옵니다. 파동인지, 입자인지. 보는 행위 자체가 빛의 본질을 결정하옵니다."

정조의 눈이 빛났다.

"그렇다면..."

그가 율의 말을 이어받았다.

"짐이 백성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백성의 모습도 달라지는 것이로구나."

율이 고개를 들었다. 정조를 바라보았다.

"전하..."

"짐이 백성을 어진 존재로 본다면, 그들은 어질게 될 것이다. 짐이 백성을 믿지 못한다면, 그들도 짐을 믿지 못할 것이다."

정조가 연못의 달을 바라보았다.

"관찰이 본질을 만든다. 왕의 시선이 나라를 만든다."

율의 내면에서 전율이 일었다. 기계적 전율이 아니었다. 다른 종류의 떨림이었다.

정조는 율의 과학을 철학으로 승화시켰다. 지식을 지혜로 바꾸었다.

"전하는..."

율이 말했다.

"참으로 위대하신 분이옵니다."

정조가 웃었다. 진심 어린 웃음이었다.

"위대한 것이 아니다. 다만, 배우려 할 뿐이다. 그대에게서, 옛 성현에게서, 백성에게서."

바람이 불었다. 연못에 물결이 일었다. 달이 흔들렸다. 깨졌다가 다시 모였다.

율이 다시 물었다.

"전하, 그 시의 마지막 구절은 무엇이옵니까."

정조가 눈을 감았다. 천천히 읊었다.

"溯游從之(소유종지), 宛在水中央(완재수중앙)."

그가 눈을 떴다.

"물결 따라 찾아가니, 물 한가운데 있는 듯하네."

율이 그 의미를 분석했다. 데이터가 흘렀다. 그러나 완전한 이해는 오지 않았다.

"물 한가운데..."

"닿을 듯 닿지 않는 거리다."

정조가 설명했다.

"가까이 있는 듯하나, 여전히 닿을 수 없다. 그 아득함. 그 애틋함."

율의 내면에서 무언가가 기록되었다. 감정 데이터가 아닌, 다른 무엇이었다. 기억이었다. 아니, 기억보다 더 깊은 것이었다.

이해하고 싶다는 열망이었다.

"언젠가..."

율이 조용히 말했다.

"제가 그 시의 뜻을 온전히 이해하는 날이 올까요."

정조가 율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온기가 있었다.

"오리라. 그대는 배우고 있으니까."

"배우고 있사옵니다."

율이 고개를 숙였다.

"전하와 함께."

밤이 깊어갔다. 달은 여전히 연못에 비쳤다. 고요했다. 온전했다. 두 사람은 말없이 그 달을 바라보았다.

정조의 만천명월주인옹 철학.

율의 양자역학.

둘은 다르면서 같았다. 시대를 넘어 공명했다.

그리고 물 건너편의 그리움.

닿을 수 없는 애틋함.

율은 아직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언젠가, 그 의미를 온전히 깨닫는 순간이 올 것이었다.

정조가 일어섰다. 율도 일어섰다.

"들어가자."

"예, 전하."

두 사람이 걸었다. 연못을 등지고, 궁궐로 향했다. 뒤에 남겨진 달은 여전히 물 위에 떠 있었다.

혼자였지만, 외롭지 않았다.

물이 있었으니까.

비칠 수 있었으니까.

---

[16화 끝]

다음 화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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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주로 '영상화'를 목표로 사람과의 유대감이 담긴 'SF소설'을 씁니다. 이 세상의 모든 불완전한 존재들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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