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사극 <시간을 품은 달>
율은 창덕궁 후원 언덕에 서 있었다. 한양의 전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기와지붕들이 물결처럼 이어졌다. 연기가 피어올랐다. 아침 식사를 준비하는 백성들의 연기였다.
그의 내면에서 데이터가 흘렀다.
인구 밀집도, 식량 분배율, 상업 활동 지수. 숫자들이 푸른 선으로 펼쳐졌다가 사라졌다. 그러나 숫자 너머로 무언가가 보였다. 굶주린 아이의 울음. 빈손으로 돌아서는 노인의 등. 특권에 막힌 상인의 탄식.
그것은 데이터가 아니었다.
"율."
정조의 목소리였다. 율은 고개를 돌렸다.
정조가 그의 곁에 섰다. 왕의 곤룡포가 바람에 일렁였다. 그의 얼굴은 단호했다. 그러나 눈빛은 무거웠다.
"오늘 신해통공을 선포한다."
율은 고개를 숙였다. "명을 받들겠사옵니다."
정조는 한양을 바라보았다. "시전 상인들의 특권을 폐지한다. 금난전권도 점차 풀어갈 것이다. 누구나 장사할 수 있어야 한다."
"전하."
"짐은 안다." 정조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들이 반발할 것을. 기득권을 가진 자들은 결코 쉽게 놓지 않는다."
율의 내면에서 연산이 시작되었다.
시전 상인 기득권층 저항 확률: 89.4%
정책 초기 혼란 지수: 상승세
장기적 경제 활성화 가능성: 72.1%
그러나 확률 너머로, 율은 다른 것을 보았다. 좁은 골목에서 장사하는 여인의 손. 헐값에 물건을 파는 행상의 얼굴. 특권에 가로막힌 꿈들.
"전하께서 옳으십니다."
율의 목소리가 달라졌다. 정조가 그를 보았다.
"옳다고 생각하느냐?"
"예." 율은 정조를 바라보았다. "시장의 자유는... 생존의 문제입니다."
정조의 눈빛이 깊어졌다.
인정전의 조정이 술렁였다.
"전하, 신해통공은 시기상조입니다!"
노론 대신이 목소리를 높였다. "시전 상인들의 권리를 빼앗는다면, 시장 질서가 무너질 것입니다."
정조는 어좌에 앉아 있었다. 그의 옆, 기둥 그림자 속에 율이 서 있었다. 은빛 갑옷이 희미하게 빛났다.
"질서라 하느냐." 정조의 목소리가 차가웠다. "소수의 특권이 질서인가, 아니면 백성 모두가 살 길을 찾는 것이 질서인가."
"그러나 전하—"
"금난전권은 소수를 위한 법이다." 정조가 일어섰다. "육의전을 제외한 나머지는 풀겠다. 백성이 스스로 장사하고, 스스로 살 길을 찾게 하라."
율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움직였다. 그의 내면에서 조정 내 세력 분포가 재구성되었다. 찬성파, 반대파, 중립파. 선들이 교차했다.
그러나 동시에, 율은 정조의 떨림을 감지했다.
미세한 근육의 긴장. 억눌린 분노. 고독한 결단.
정조는 홀로 싸우고 있었다.
밤이 깊었다.
정조는 서재에 앉아 있었다. 책상 위에 상소문이 쌓여 있었다. 시전 상인들의 반발, 노론 대신들의 항의, 혼란을 우려하는 목소리들.
촛불이 흔들렸다. 그림자가 벽에 일었다가 사라졌다.
율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전하, 혜경궁마마께서 오십니다."
정조가 고개를 들었다. 잠시 후, 혜경궁 홍씨가 들어왔다. 그녀의 얼굴은 온화했다. 그러나 눈빛은 깊었다.
"마마."
정조가 일어나 예를 갖추었다. 혜경궁이 그의 손을 잡았다.
"또 잠을 못 주무시는구나."
"괜찮사옵니다."
"괜찮지 않다." 혜경궁의 목소리가 부드러웠다. "네 얼굴을 보면 안다."
정조는 입술을 깨물었다.
혜경궁이 창가로 걸어갔다. 달빛이 그녀의 옷자락을 비췄다.
지금 바로 작가의 멤버십 구독자가 되어
멤버십 특별 연재 콘텐츠를 모두 만나 보세요.
오직 멤버십 구독자만 볼 수 있는,
이 작가의 특별 연재 콘텐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