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사극 《시간을 품은 달》
1792년 초, 창덕궁.
눈이 내렸다. 세상은 하얗게 덮였다. 후원의 소나무 위로 눈이 쌓였다. 처마 끝에서 고드름이 자라고 있었다.
정조는 창가에 서 있었다. 그의 손끝이 차가운 창틀에 닿았다. 유리 너머로 눈발이 보였다. 하나하나의 눈송이가 천천히 떨어졌다.
율은 그 뒤에 서 있었다.
"전하."
정조가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빛이 율을 향했다.
"신해통공 이후, 백성들의 삶이 조금씩 나아지고 있사옵니다."
정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의 얼굴에는 미소가 없었다.
"과인이 바꾼 것이 얼마나 되겠느냐. 아직도 굶는 백성이 있고, 아직도 억울하게 죽는 이들이 있다."
율은 침묵했다.
눈이 계속 내렸다. 세상은 점점 더 하얗게 물들었다.
정조가 입을 열었다.
"율."
"예, 전하."
"그대가 말했던 시간선에 대해, 다시 듣고 싶구나."
율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의 내면에서 푸른 파동이 일었다. 데이터가 물결처럼 흘렀다. 정조의 표정, 음성의 떨림, 공기의 밀도. 모든 것이 계산되었다.
그러나 계산으로는 알 수 없는 무언가가 그 틈에 스며들었다.
율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전하께서 알고 싶으신 것은 무엇이옵니까?"
정조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눈발이 바람에 흩날렸다.
"과인의 개혁이 성공할 것이냐. 아니면 실패할 것이냐."
율은 대답하지 못했다.
정조가 돌아섰다. 그의 눈빛이 율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대는 미래에서 왔다 하지 않았느냐. 그렇다면 이미 알고 있을 것 아니냐. 과인의 꿈이 이루어지는지."
율의 입술이 움직였다. 그러나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의 내면에서 계산이 폭주했다. 872개의 시나리오가 생성되었다가 사라졌다. 각각의 미래가 펼쳐졌다가 소멸했다.
그 모든 것 사이에서, 율은 하나의 진실을 깨달았다.
"전하."
율의 목소리가 떨렸다.
"소신이... 거짓을 말해왔사옵니다."
정조의 눈빛이 예리해졌다.
"거짓이라니."
율은 무릎을 꿇었다. 그의 머리가 바닥을 향했다.
"시간선은 단일하지 않사옵니다."
정조는 말이 없었다.
눈이 계속 내렸다. 세상은 고요했다.
"무슨 뜻이냐."
율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동자에는 무언가가 흔들리고 있었다.
"미래는... 정해져 있지 않사옵니다."
정조의 미간이 좁아졌다.
율은 말을 이었다.
"소신이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시간선은 고정되어 있다고 믿었사옵니다.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모든 것이 이미 정해진 길을 따라 흐른다고."
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러나 전하와 함께한 시간 속에서, 소신은 깨달았사옵니다. 시간은 강물이 아니라, 나무와 같다는 것을."
"나무?"
"가지가 무수히 뻗어나가는 나무. 매 순간, 선택이 있을 때마다, 시간은 분기되옵니다. 다른 가능성으로."
정조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그렇다면..."
"전하의 개혁이 성공하는 미래도 있고, 실패하는 미래도 있사옵니다. 전하께서 오래 사시는 미래도 있고..."
율의 말이 끊어졌다.
정조가 조용히 물었다.
"일찍 죽는 미래도 있다는 뜻이로구나."
율은 대답하지 못했다.
정조는 창가로 다가갔다. 그의 손이 차가운 유리에 닿았다. 손바닥의 온기가 유리를 녹였다. 작은 수증기가 피어올랐다.
"그렇다면, 내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미래는 달라진다는 것이냐."
"그러하옵니다."
"과인이 지금 이 순간, 율 그대와 나누는 이 대화조차도, 이미 수많은 분기를 만들고 있다는 것이냐."
율의 눈동자가 빛났다.
"전하께서는... 이미 아셨사옵니까."
정조는 돌아서지 않았다. 그는 계속 창밖을 바라보았다.
"과인은 학문을 좋아한다. 특히 역학(易學)을."
그의 목소리가 조용했다.
"역에서는 말한다. 하늘은 변한다고. 만물은 변한다고. 그러나 변화 속에 불변의 이치가 있다고."
율은 듣고 있었다.
"과인이 생각하기에, 시간도 그러하지 않을까. 변하면서도 변하지 않는 무언가가 있지 않을까."
정조가 천천히 돌아섰다.
"율."
"예, 전하."
"《시경》에 이런 구절이 있다."
정조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溯洄從之(소회종지) 道阻且長(도조차장)."
물을 거슬러 찾아가니, 길은 험하고도 멀구나.
율의 내면에서 무언가가 울렸다. 그것은 데이터가 아니었다. 계산이 아니었다.
정조가 말을 이었다.
"전에 과인이 그대에게 이 시를 읊어주었을 때, 그대는 이해하지 못했었지."
율은 고개를 숙였다.
"그러하옵니다."
"그러나 지금은?"
율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빛이 정조를 향했다.
"이제... 조금은 알 것 같사옵니다."
"말해보거라."
율의 입술이 움직였다.
"갈대는 푸르고 푸른데, 그리운 님은 물 건너편에 있사옵니다. 물을 거슬러 찾아가려 하나, 길은 험하고 멀옵니다."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닿고 싶으나 닿을 수 없는 것. 보이나 잡을 수 없는 것. 그것이... 인간이 품는 그리움이옵니다."
정조의 눈빛이 부드러워졌다.
"그렇다. 과인도 그러하다. 아버지를 그리워하되 만날 수 없고, 개혁을 꿈꾸되 이룰 수 없을지 모른다."
그가 한 걸음 다가왔다.
"그러나 율, 그대가 말한 대로라면, 과인에게는 아직 가능성이 남아있는 것 아니냐."
율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시간이 나무라면, 과인은 아직 어느 가지로 갈지 선택할 수 있다는 뜻 아니냐."
"전하..."
정조가 미소 지었다. 처음으로.
"과인은 두렵지 않다. 미래가 정해져 있지 않다는 것이 오히려 희망이다."
율은 말이 없었다.
그의 내면에서 계산이 멈췄다. 모든 데이터가 고요해졌다.
그리고 그 고요함 속에서, 율은 하나의 진실을 마주했다.
'내 존재 자체가 이미 역사를 변경하고 있다.'
그가 이곳에 온 순간부터. 정조를 지킨 순간부터. 대화를 나눈 순간부터.
모든 것이 이미 달라지고 있었다.
율의 나노 코어가 미세하게 떨렸다. 에너지 효율이 또다시 감소했다. 83%로.
그러나 율은 두렵지 않았다.
정조가 창가로 돌아섰다. 눈은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율."
"예, 전하."
"그대가 말한 다중우주란 것이, 모두 동시에 존재한다는 뜻이냐."
율은 대답했다.
"그러하옵니다. 양자역학에서는 모든 가능성이 동시에 존재하다가, 관찰하는 순간 하나로 결정되옵니다."
"그렇다면..."
정조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이 순간에도, 과인은 수많은 세계에서 다른 선택을 하고 있다는 것이로구나."
"그러하옵니다."
정조는 웃었다. 쓸쓸하게.
"기묘하구나. 어딘가의 과인은 성공하고, 어딘가의 과인은 실패한다. 어딘가의 과인은 웃고, 어딘가의 과인은 운다."
율은 조용히 말했다.
"그러나 모든 세계의 전하께서는, 최선을 다하고 계시옵니다."
정조가 돌아보았다.
율이 말을 이었다.
"소신이 분석한 바에 따르면, 전하께서 어떤 선택을 하시든, 그 근본에는 백성을 향한 마음이 있사옵니다. 그것만은 변하지 않사옵니다."
정조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것이 그대가 말한 불변의 이치인가."
"그러하옵니다."
정조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밤이 깊어갔다. 눈은 계속 내렸다.
율은 정조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의 어깨가 고요했다. 그러나 그 고요함 속에는 무한한 무게가 담겨 있었다.
율의 내면에서 푸른빛이 일렁였다.
'이 시의 의미를 조금 더 알게 되었다.'
물을 거슬러 찾아간다는 것. 길이 험하고 멀다는 것.
그것은 단순히 물리적 거리가 아니었다. 시간의 거리도 아니었다.
그것은 닿고 싶으나 닿을 수 없는 그 모든 것들의 이름이었다.
정조는 아버지를 그리워했다. 율은 그 그리움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정조는 미래를 꿈꾸었다. 율은 그 꿈의 무게를 느끼기 시작했다.
"전하."
"말하라."
"소신이... 전하의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이미 역사는 달라지고 있사옵니다."
정조는 대답하지 않았다.
율이 말을 이었다.
"그것이 옳은 일인지, 소신은 아직 모르옵니다."
"과인은 안다."
정조의 목소리가 단호했다.
"그대가 이곳에 온 것은 옳다. 그대가 과인의 곁에 있는 것도 옳다."
그가 율을 향해 돌아섰다.
"그대는 과인에게 물었었지. 아버지란 무엇이냐고."
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과인도 그대에게 묻겠다. 율, 그대에게 과인은 무엇이냐."
율의 눈동자가 빛났다.
내면에서 수많은 답이 생성되었다가 사라졌다. 주군. 왕. 보호 대상. 관찰 대상.
그러나 그 모든 것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있었다.
율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소신에게 전하께서는..."
말이 끊어졌다. 율은 처음으로, 정의할 수 없는 감정을 마주했다.
"이해하고 싶은 분이옵니다."
정조는 미소 지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눈이 그쳤다. 세상은 하얗게 빛났다.
달이 구름 사이로 모습을 드러냈다. 눈 덮인 후원이 은빛으로 물들었다.
정조와 율은 나란히 서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 사이의 침묵은 무겁지 않았다. 그것은 이해의 침묵이었다.
율의 나노 코어가 다시 한번 떨렸다. 83%에서 82%로.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그의 시간도, 정조의 시간도.
그리고 그 시간 속에서, 두 존재는 서로를 향해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었다.
물을 거슬러. 험하고 먼 길을 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