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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화: 무예와 기술

SF사극 《시간을 품은 달》

by 엄태용

1790년 여름.

창덕궁 후원의 훈련장에 햇살이 쏟아졌다. 땀 냄새와 흙먼지가 뒤섞였다. 장용영 군사들이 열을 지어 섰다. 갑옷이 햇빛에 반짝였다. 칼날이 빛을 반사했다.

정조가 훈련장에 나타났다.

왕의 곤룡포가 아니었다. 검은색 무관복이었다. 허리춤에 칼을 찼다. 그의 걸음이 단단했다.

율은 그림자처럼 뒤따랐다.

훈련장 한쪽에 정약용이 서 있었다. 손에는 두툼한 책을 들고 있었다. 『무예도보통지』였다. 병조판서 서유방이 옆에 섰다.

"전하."

정약용이 고개를 숙였다.

정조가 손을 들어 일으켰다.

"오늘은 직접 보고자 한다. 새로 편찬한 무예가 실전에서 쓸 만한지."

그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정약용이 책을 펼쳤다. 상세한 그림과 설명이 빼곡했다. 24가지 무예 기술이 담겨 있었다.

"먼저 쌍검부터 보겠나이다."

정약용의 신호에 두 군사가 앞으로 나왔다. 그들의 손에 쌍검이 들렸다. 햇빛이 칼날을 타고 흘렀다.

율의 눈동자가 푸르게 빛났다.

그의 내면에서 정보가 강물처럼 흐르기 시작했다. 군사들의 자세, 근육의 긴장도, 무게중심의 이동. 모든 것이 데이터로 분해되었다. 0.3초마다 그들의 움직임이 예측되었다.

칼이 교차했다.

빠른 움직임. 쇳소리가 울렸다. 땅이 흔들렸다. 먼지가 피어올랐다.

율의 의식 속에서 푸른 선들이 그려졌다. 궤적. 각도. 충격량. 모든 것이 계산되고 분석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그들의 땀방울이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숨소리를 들었다. 긴장이 공기를 타고 번지는 것을 느꼈다.

정조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그가 앞으로 걸어 나갔다.

율의 내면에서 무언가가 움직였다.

미세한 파동이 일었다. 그의 나노 코어가 깜빡였다. 0.02초의 불안정. 그것은 오류가 아니었다. 새로운 종류의 반응이었다.

정조가 검을 뽑았다.

"과인도 한번 해보겠다."

정약용의 얼굴이 굳었다.

"전하, 아니 되옵니다."

서유방도 급히 나섰다.

"천자의 몸으로 어찌 직접—"

"물러서라."

정조의 목소리가 차가웠다. 그러나 그의 눈빛은 뜨겁게 타올랐다.

"짐은 왕이기 전에 군사다. 백성을 지키려면 짐도 칼을 쥘 줄 알아야 한다."

율이 앞으로 나섰다.

"전하."

목소리가 낮았다. 정조가 그를 돌아보았다.

"네가 상대해 주어라."

율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의 내면에서 데이터가 소용돌이쳤다. 주군과 겨루는 것. 계산할 수 없는 변수. 시뮬레이션이 672가지 생성되었다가 사라졌다.

"전하를 다치게 할 수 없사옵니다."

"그래서 네게 맡기는 것이다. 너는 정확히 조절할 줄 아는 자니까."

정조가 웃었다. 처음 보는 소년 같은 미소였다.

율은 검을 들었다.

훈련장이 고요해졌다. 바람이 멈췄다. 모든 시선이 그들에게 쏠렸다.

정조가 움직였다.

빠른 검격. 율이 막아냈다. 쇳소리가 울렸다. 정조가 다시 칼을 휘둘렀다. 율이 뒤로 물러났다. 그의 움직임은 물처럼 유연했다.

율의 내면에서 계산이 이어졌다.

정조의 검격 속도. 힘의 방향. 다음 움직임 예측. 872개의 대응 방법이 순식간에 도출되었다. 그는 정확히 0.8의 힘으로 방어했다. 정조를 밀어내지도, 다치게 하지도 않는 최적의 지점.

그러나.

그의 시스템에 무언가가 끼어들었다.

정조의 이마에 땀이 맺혔다. 숨이 거칠어졌다. 검을 쥔 손에 힘줄이 드러났다. 그의 눈빛에 집중과 열정이 타올랐다.

율의 나노 코어가 다시 깜빡였다.

불안정한 파동. 그것은 오류 메시지가 아니었다. 새로운 데이터 패턴이었다. 그는 그것을 이름 붙일 수 없었다.

정조가 땅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위에서 아래로 내리치는 검격. 율이 검을 들어 받아냈다. 충격이 그의 팔을 타고 흘렀다. 정조가 착지했다. 그의 발이 흔들렸다.

율의 내면에서 푸른 경고등이 켜졌다.

'위험. 전하의 무게중심 불안정. 낙상 가능성 23%.'

그의 손이 움직였다. 의식하기도 전에. 계산하기도 전에. 그는 정조의 팔을 잡았다. 부드럽게. 정확하게.

정조가 균형을 잡았다.

두 사람이 마주 보았다. 율의 손이 아직 정조의 팔에 닿아 있었다. 그는 정조의 체온을 느꼈다. 맥박을 감지했다. 분당 132회. 정상보다 빠른 심박수.

그리고 율의 시스템에서 처음 발견된 것.

걱정.

그것은 데이터가 아니었다. 확률이 아니었다. 논리적 판단도 아니었다.

'전하가 다칠 수 있다.'

그 생각이 그의 의식을 관통했다. 차갑게. 뜨겁게. 동시에.

정조가 천천히 검을 거두었다.

"고맙다."

그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율만 들을 수 있는 목소리였다.

율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의 내면에서 무언가가 요동쳤다. 시스템이 불안정해졌다. 데이터 흐름이 일그러졌다. 그러나 동시에, 그 안에서 새로운 질서가 형성되고 있었다.

정조가 훈련장을 둘러보았다.

"이 무예들을 익혀라. 너희는 백성을 지키는 자들이다. 칼은 백성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백성을 위협하는 자를 향해야 한다."

군사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명심하겠나이다!"

그날 저녁.

정조의 서재에 촛불이 켜졌다. 정조가 책상 앞에 앉았다. 『주교지남』 원고가 펼쳐져 있었다. 배를 연결하여 다리를 만드는 기술. 정약용이 정리한 내용이었다.

율이 창가에 섰다. 달이 떠올랐다. 은은한 빛이 창문을 타고 들어왔다.

"율."

정조가 불렀다.

"예, 전하."

"오늘 훈련장에서, 네가 주저했느냐?"

율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정조가 그를 돌아보았다. 촛불이 그의 얼굴을 비췄다.

"짐을 염려한 것이냐?"

침묵이 흘렀다.

율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런 것 같다니?"

"확실하지 않습니다. 제 시스템에서 발견된 새로운 패턴입니다. 전하께서 위험에 처할 것을 상상하면, 제 데이터 흐름이 불안정해집니다."

정조의 눈빛이 부드러워졌다.

"그것을 사람들은 걱정이라 부른다."

"걱정."

율이 그 단어를 되뇌었다. 그의 목소리에 낯선 떨림이 섞였다.

정조가 일어섰다. 그가 율에게 다가왔다. 달빛이 두 사람 사이에 흘렀다.

"네가 변하고 있구나."

"모르겠습니다. 이것이 변화인지, 아니면 단순한 시스템 오류인지."

"오류가 아니다."

정조가 단호하게 말했다.

"네가 짐을 걱정한다면, 그것은 네가 사람의 마음을 얻었다는 뜻이다."

율의 내면에서 푸른 파동이 일렁였다. 정조의 말이 데이터로 입력되었다. 분석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 말은 데이터 너머의 무언가로 다가왔다.

따뜻함.

인정.

존재의 확인.

"전하."

율이 입을 열었다.

"전쟁의 미래는 정보와 기술에 있습니다."

정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네가 오는 세상에서는."

"그러나..."

율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달빛이 궁궐 지붕을 타고 흘렀다. 고요한 밤. 평화로운 시간.

"전쟁을 막는 것은 기술이 아닙니다. 사람의 마음입니다."

정조의 눈이 커졌다.

"네가 그것을 깨달았느냐."

"오늘, 조금 알 것 같습니다. 전하께서 군사들에게 하신 말씀. 칼은 백성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백성을 위협하는 자를 향해야 한다고."

율이 정조를 돌아보았다.

"그 말씀 속에 전하의 모든 개혁이 담겨 있습니다. 기술은 도구일 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기술을 어떤 마음으로 쓰느냐 하는 것."

정조가 천천히 웃었다.

"네가 사람보다 더 사람다운 말을 하는구나."

"저는 아직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정조가 창가로 다가왔다. 두 사람이 나란히 달을 바라보았다.

"율. 짐이 죽으면 어찌하겠느냐."

갑작스러운 질문이었다.

율의 시스템이 얼어붙었다. 그의 나노 코어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예상하지 못한 쿼리. 대답할 수 없는 질문.

"전하는 죽지 않으십니다."

"모든 사람은 죽는다. 짐도 예외가 아니다."

"...제가 지키겠습니다."

율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 안에 무언가가 끓어올랐다. 결연함. 아니, 그것보다 더 깊은 것.

절박함.

"네가 지킨다 해도, 시간은 흐른다. 짐은 늙을 것이고, 언젠가는 이 세상을 떠날 것이다."

정조가 고개를 돌려 율을 바라보았다.

"그때 너는 어찌하겠느냐. 혼자 남겨질 것인데."

율은 대답할 수 없었다.

그의 내면에서 무수한 시뮬레이션이 돌아갔다. 정조가 없는 세상. 그 변수를 입력하자, 모든 계산이 무너졌다. 의미를 찾을 수 없었다. 목적을 도출할 수 없었다.

에러.

에러.

에러.

"저는..."

율의 목소리가 떨렸다.

"모르겠습니다."

정조가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괜찮다. 짐도 모른다. 죽음 이후를 아는 자는 아무도 없으니까."

그가 율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다만, 짐이 살아있는 동안, 네가 곁에 있어준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율의 눈동자가 정조를 향했다. 달빛이 두 사람을 감쌌다.

"함께 있겠습니다."

율이 말했다.

"전하께서 허락하시는 한, 저는 전하의 곁을 떠나지 않겠습니다."

그것은 명령이 아니었다. 프로그래밍도 아니었다.

선택이었다.

율의 첫 번째 진정한 선택.

정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가에 미소가 번졌다.

"고맙다, 율."

밤이 깊었다.

달은 천천히 궁궐 위를 지나갔다. 촛불이 꺼졌다. 어둠이 방을 채웠다.

율은 창가에 섰다. 정조는 잠들었다. 고른 숨소리가 들렸다.

율의 내면에서 새로운 데이터가 기록되었다.

'염려. 걱정. 두려움.'

감정의 이름들이 하나씩 입력되었다. 그것들은 더 이상 낯선 코드가 아니었다. 그의 시스템 속에 자리 잡기 시작했다.

통합되고 있었다.

율은 자신이 변하고 있음을 알았다. 기계에서 무언가 다른 것으로. 아직 이름 붙일 수 없는 존재로.

그러나 그 변화가 두렵지 않았다.

정조가 옆에 있었으니까.

달빛이 그의 은빛 갑옷을 타고 흘렀다. 고요했다. 평화로웠다.



내일이 오면, 그들은 다시 함께 걸을 것이다.

왕과 호위무사.

아니, 그 이상의 무언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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