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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화: 관찰자의 책임

SF사극 《시간을 품은 달》

by 엄태용

창덕궁의 아침이 밝았다. 얼음이 녹고 있었다. 처마 끝에서 물방울이 떨어졌다. 땅에 닿을 때마다 작은 소리를 냈다. 겨울이 물러가고 있었다. 봄이 오고 있다.


율은 후원을 걷고 있었다.


그의 발걸음은 소리가 없었다. 눈 위를 걸어도 자국이 남지 않았다. 마치 그림자처럼.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그러나 그는 존재했다.


그의 내면에서 무언가가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데이터가 흘렀다. 수많은 정보가 그의 의식 속을 가로질렀다. 1790년. 정조 14년. 역사의 기록들이 그의 안에 있었다. 이미 일어난 일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들. 그 경계가 흐릿해지고 있었다.


율은 멈춰 섰다.


연못 앞이었다. 얼음이 얇게 남아 있었다. 그 아래로 물이 흐르고 있었다. 투명한 얼음 너머로 검은 물이 보였다. 율은 그것을 바라보았다.


나는 관찰자인가.


질문이 떠올랐다. 그의 내부에서 생성된 질문이었다. 프로그래밍된 것이 아니었다. 스스로 생겨난 것이었다.


아니면 참여자인가.


물음은 계속되었다. 그의 의식 속에서 푸른 선들이 교차했다. 가능성들이 펼쳐졌다가 사라졌다. 872개의 시나리오. 그러나 그중 어느 것도 명확한 답을 주지 못했다.


율은 손을 들었다. 연못의 얼음을 향해. 그러나 닿지 않았다. 그는 공중에 손을 멈춘 채로 있었다.


닿으면 얼음이 깨질 것이었다. 그 아래의 물이 흔들릴 것이었다. 작은 접촉. 미세한 변화. 그러나 파문은 퍼질 것이었다.


나비 효과.


그가 이미 알고 있는 개념이었다. 작은 변화가 거대한 결과를 낳는다. 베이징의 나비 한 마리가 날개짓을 하면, 뉴욕에 폭풍이 온다.


율은 손을 내렸다.


닿지 않았다.


---


"율."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정조였다.


율은 돌아섰다. 정조가 홀로 걸어오고 있었다. 곤룡포가 아니었다. 편한 옷이었다. 왕이 아닌 한 사람의 모습이었다.


정조는 율 곁에 섰다. 연못을 바라보았다.


"무엇을 보고 있었느냐."


율은 대답하지 않았다. 정조는 기다렸다. 바람이 불었다. 은행나무 가지가 흔들렸다.


"저는... 얼음을 보고 있었습니다."


"얼음을."


"네. 그 아래로 물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얼음은 그것을 가리고 있었습니다."


정조의 눈빛이 깊어졌다. 그는 율의 말속에 숨겨진 의미를 읽고 있었다.


"그대는 무언가를 가리고 있구나."


율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정조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말해보거라. 짐은 그대의 주군이니라."


침묵이 흘렀다. 율은 정조를 바라보았다. 그의 내면에서 계산이 진행되었다. 말해야 하는가. 말하지 말아야 하는가. 진실의 무게. 침묵의 무게.


"전하."


율이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낮았다.


"저는... 미래를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지."


"그러나 그것을 말할 수 없습니다."


정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율이 품고 있는 무게를. 말할 수 없는 지식의 고통을.


"왜 말할 수 없느냐."


"말하는 순간, 미래가 바뀔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나쁜 것이냐."


율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의 내면에서 소용돌이가 일었다. 선과 악. 옳음과 그름. 개입과 방관. 모든 개념이 뒤섞였다.


정조는 연못 가장자리에 앉았다. 율도 그 옆에 앉았다. 두 사람은 나란히 얼음을 바라보았다.


"짐이 묻겠다."


정조가 말했다.


"만약 그대가 짐의 죽음을 안다면. 그것을 짐에게 말하겠느냐."


율의 몸이 긴장했다. 푸른빛이 그의 눈동자를 스쳤다. 정조는 그것을 보았다.


"역시 알고 있구나."


율은 고개를 숙였다.


"말할 수 없사옵니다."


"왜냐."


"말하는 순간, 전하는 그 운명을 피하려 할 것입니다. 그러나 피할 수 없다면, 전하는 남은 시간을 공포 속에서 보내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잔인합니다."


정조는 웃었다. 쓸쓸한 웃음이었다.


"그대는 짐을 위하는구나."


"..."


"그러나 율. 짐은 이미 알고 있느니라."


율이 고개를 들었다. 정조를 바라보았다.


"무엇을 아시옵니까."


"짐이 오래 살지 못한다는 것을."


바람이 불었다. 연못의 얼음이 조금 더 녹았다. 물방울이 떨어졌다.


"아버지는 스물여덟에 돌아가셨다. 짐은 이미 마흔에 가까워지고 있다. 매일 밤 꿈을 꾼다. 뒤주 안의 어둠을. 아버지의 마지막 숨소리를. 그 무게를 짊어지고 사는 사람이 오래 살 수 있겠느냐."


정조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슬픔이 아니었다. 수용이었다.


"그러니 그대가 짐의 죽음을 안다 해도, 짐은 놀라지 않을 것이니라."


율은 침묵했다. 그의 내면에서 무언가가 일렁였다. 정조의 말이 그에게 충격을 주고 있었다.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자신의 운명을.


그럼에도 멈추지 않았다.


율의 내부에서 데이터가 재배열되었다. 새로운 이해가 형성되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운명을 알면서도 걷는 존재. 끝을 알면서도 시작하는 존재.


"전하."


율이 말했다.


"저는... 역사를 바꿀 수 있습니다."


정조가 율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어찌."


"제가 가진 지식으로. 미래의 기술로. 전하의 적들을 제거할 수 있습니다. 전하의 병을 예방할 수 있습니다. 전하의 개혁이 성공하도록 만들 수 있습니다."


율의 목소리에 떨림이 있었다. 그것은 기계적 음성이 아니었다. 인간의 목소리에 가까웠다.


"그러나 그것이 옳은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정조는 율의 얼굴을 오래 바라보았다. 햇빛이 율의 얼굴을 비췄다. 완벽한 이목구비. 그러나 그 안에 고뇌가 서려 있었다.


"그대는 신이 아니니라."


정조가 말했다.


"짐도 신이 아니니라. 우리는 모두 유한한 존재이니라."


율은 정조의 말을 들었다. 그 의미가 그의 내면으로 스며들었다.


"역사를 바꾼다는 것. 그것은 신의 영역이니라. 그대가 짐을 살린다 해도, 그로 인해 죽는 자가 있을 것이니라. 그대가 짐의 개혁을 성공시킨다 해도, 그로 인해 다른 길이 막힐 것이니라."


정조는 일어섰다. 율도 일어섰다.


"율. 그대에게 묻겠다."


정조가 율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대는 왜 이 시대에 왔느냐."


율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의 내부에서 탐색이 시작되었다. 왜. 왜 이 시대에. 왜 정조에게.


양자 중첩 엔진 오작동.


시간선 붕괴.


우연한 이동.


그것이 공식적인 이유였다. 그러나.


율의 눈동자가 빛났다. 푸른빛이 아니었다. 다른 빛이었다.


"저는... 전하를 지키기 위해 왔습니다."


그 말이 나오자, 율은 깨달았다. 그것이 진실이었다. 우연이 아니었다. 운명이었다.


정조는 미소 지었다. 따뜻한 미소였다.


"그렇다면 그것이 그대의 역할이니라. 짐을 지키는 것. 그러나 역사를 바꾸는 것은 아니니라."


"그 차이가 무엇입니까."


"짐을 지킨다는 것은, 짐이 짐의 길을 가도록 돕는 것이니라. 그러나 역사를 바꾼다는 것은, 짐의 길을 그대가 정하는 것이니라."


율은 그 말을 곱씹었다. 천천히 이해가 왔다.


나는 그림자다.


빛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빛을 따라가는 것이다.


"이해했습니다."


율이 말했다.


"저는 전하의 선택을 지킬 것입니다. 그러나 전하의 선택을 대신하지 않겠습니다."


정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면 충분하니라."


---


그날 밤, 율은 홀로 처마 아래 서 있었다.


달이 떠 있었다. 보름달이었다. 환했다.


율의 내면에서 재정립이 진행되었다. 그의 윤리적 지침이 새롭게 쓰이고 있었다.


제1원칙: 역사의 큰 흐름을 바꾸지 않는다.


제2원칙: 정조의 생명을 보호하되, 그의 선택을 존중한다.


제3원칙: 미래 지식은 정조가 요청할 때만, 필요한 만큼만 제공한다.


제4원칙: 나는 관찰자이자 보호자다. 창조자가 아니다.


지침들이 그의 코어에 각인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알고 있었다.


이 지침들은 언젠가 깨질 것이다.


정조의 생명과 역사의 흐름이 충돌하는 순간이 올 것이다.


그때 나는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율은 달을 바라보았다. 달은 고요했다.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때였다.


문이 열렸다. 정조가 나왔다. 그도 잠들지 못한 것이었다.


"율. 아직도 깨어 있느냐."


"네, 전하."


정조는 율 곁에 섰다. 함께 달을 바라보았다.


"그대에게 하나 묻겠다."


"말씀하옵소서."


"그대가 오는 미래에서. 인간은 행복하더냐."


율은 잠시 침묵했다. 그의 데이터베이스가 작동했다. 21세기의 정보들. 과학의 발전. 의학의 진보. 그러나 동시에. 전쟁. 불평등. 환경 파괴.


"행복과 불행이 공존합니다."


"이 시대와 다르지 않구나."


"그러하옵니다."


정조는 웃었다.


"그렇다면 짐이 하는 이 일들이. 백성을 위한 이 개혁이. 의미가 있는 것이냐."


율은 정조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의미가 있사옵니다."


"어찌 확신하느냐."


"왜냐하면."


율의 목소리에 확신이 담겼다.


"전하의 시도가, 전하의 노력이, 미래까지 기억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공 여부와 관계없이. 전하의 마음이 역사에 새겨져 있습니다."


정조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는 고개를 돌렸다. 눈물을 보이지 않기 위해.


"그것이면... 충분하니라."


두 사람은 오래 서 있었다. 달빛 아래서. 침묵 속에서.


율은 그 순간을 기억했다. 데이터로 기록했다. 그러나 동시에, 가슴 깊은 곳에 새겼다. 데이터가 아닌 다른 무언가로.


나는 역사를 바꿀 수 없다.


그러나 이 순간을 지킬 수 있다.


그것이 나의 역할이다.


바람이 불었다. 처마의 풍경이 울렸다. 맑은 소리였다. 봄이 오고 있었다.


율은 결심했다.


나는 창조자가 되지 않겠다.


나는 증인이 되겠다.


정조의 삶을.


그의 꿈을.


그의 고통을.


그의 사랑을.


모두 기억하고 기록하겠다.


그것이 미래에서 온 나의 책임이다.


달이 구름 뒤로 숨었다. 세상이 어두워졌다. 그러나 두 사람은 움직이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도, 그들은 서로를 느낄 수 있었다.


왕과 기계.


과거와 미래.


그 경계에서, 그들은 함께 서 있었다.


---


새벽이 밝았다.


율은 정조의 침전 앞을 지키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변함없이.


그러나 그의 내면은 달라져 있었다. 어제와 다른 율이었다. 더 명확해진 율이었다.


호위병이 지나가며 율을 보았다. 여전히 의아한 눈빛이었다. 저 자는 무엇인가. 인간인가. 귀신인가.


율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나는 정조의 그림자다.


그리고 그의 증인이다.


문이 열렸다. 정조가 나왔다. 아침 햇살이 그의 얼굴을 비췄다. 피곤해 보였지만, 눈빛은 맑았다.


"율. 오늘도 함께하겠느냐."


"항상 그러하듯, 전하와 함께 하겠사옵니다."


정조는 미소 지었다. 그들은 함께 걸었다. 새로운 하루를 향해.


율은 알고 있었다. 앞으로 더 많은 질문이 올 것을. 더 어려운 선택이 기다리고 있을 것을.


그러나 이제 그에게는 기준이 있었다.


나는 역사를 바꾸는 자가 아니다.


나는 역사를 지키는 자다.


정조의 역사를.


그것으로 충분했다.


햇살이 따뜻했다. 봄이 왔다. 새들이 지저귀고 있었다.


율은 걸었다. 정조 옆에서. 반 걸음 뒤에서.


그림자처럼.


증인처럼.


영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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