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로 살고 싶은 때가 있다. 애인과 함께 고양이 카페에 들르곤 하는데, 그곳 고양이들의 표정에는 한껏 평온함이 묻어있다. 그 평온함은 사실 그 고양이를 키우는 주인의 정성에서 오는 것이다. 고양이의 이름은 봄, 여름, 가을, 겨울. 사장님은 우리에게 가까이 오시더니,
"겨울이는 괜히 저렇게 심술부려요. 저 장난감 좋아하지도 않는데, 가을이가 가지고 놀면 심통이 나나 봐요." 하신다.
사장님은 가을이가 캣타워에 장난감을 보일 듯 말 듯 숨겨 놓는 것을 좋아한다고 했다. 가을이는 말을 하지도 않는데, 움직이는 것들 하나하나 세세하게 잘도 들여다보고 있으셨다.
그렇게 고양이의 얼굴에 평온함이 하나씩 찾아왔을까? 나도 고양이로 살고 싶었다. 누군가의 배려와 사랑을 듬뿍 받으며 평온하게 살고 싶었다.
문득 '고양이로 살면 평안함을 스스로 알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떠오른다. 그래. 고양이로 살면 누군가의 배려에 의해 걱정 없이 살 수 있겠다만, 걱정 없이 산다는 것이 과연 좋기만 한 것일까?
'멋진 신세계(올더스 헉슬리)'에서 야만인은 쾌락의 신세계를 설계한 이에게 가서 말한다. 자신에게 고통을 선택할 자유를 달라고. 돌멩이로, 강아지로, 고양이로 살면 고민 없이 살 수 있다. 그러나 고민 없이는 우리네 삶이 없을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