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는 자기가 놀 것도 아니면서 가을이 우는 소리 듣고 와요." 가을이라는 고양이를 쳐다보고 있으니, 고양이 카페 사장님이 옆에서 이야기하셨습니다. 싱긋 웃으시는 사장님의 미소도 따스했지만, 그들의 몸짓과 울음소리로 의미를 찾아낸다는 것이 놀랍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간의 언어는 얼마나 큰 한계를 가질까요. 고양이는 작은 몸짓으로도 수많은 의미들을 표현하고 있는 듯 보였습니다. 카페 사장님은 고양이들의 행동과 울음소리를 나름으로 번역해 내고 있었지요.
저도 가끔 언어에 갇혀서 본질로부터 멀어지는 경험들을 하곤 합니다. 예를 들면 '친구라면', '가족이라면', '정상적인 사람이라면'이라는 조건을 쉽게 붙이고 말을 꺼냅니다. 그러나 '친구'라는, '가족'이라는, '정상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칼로 자르듯 정의 내릴 수는 없습니다. 언어에 사로잡히게 된다면 '당위성'을 상대에게 무턱대고 제시하지요. 박완서 작가는 당신의 수필 '보통 사람'에서 '보통 사람'은 없음을 이야기합니다. 각자 한번 생각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스스로가 생각하는 보통 사람이라면 어떤 모습을 갖고 있는가 하고요. 보통 사람은 결국 없습니다.
나의 생각으로 빚어진 언어로 상대를 대하는 것은 폭력의 씨앗이 됩니다. 철학자 강신주도 말하듯 인문학의 기본 정신은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공자도 기소불욕 물시어인이라 말하고, 부처도 무주상보시를 말합니다. 예수도 네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하지요. 내 언어가 아니라,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는 것이 우선 될 때 우리는 소통이 시작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고양이를 보면서 우리의 언어를 들이대지 않습니다. 그들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지켜보고 알아내고자 애쓰지요.이렇듯 우리들의 언어를 이따금 내려놓고 주위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자신의 세계가 확장됩니다. 사랑이 별다른 것이 아닙니다. 내가 아닌 것들에게 귀를 기울이는 것부터 시작인 것이지요.
이 지점에서 선생님으로서 반성할 거리들이 생깁니다. '착한 아이'라는 말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저는 제 머릿속에 있는 '착한 아이들'로 아이들을 제단하며 살아온 듯합니다. '착한 아이'는 어떠한 모습일까요? 아마 선생님들의 말씀을 잘 듣는, 딴짓하지 않고 공부를 열심히 하는아이일 것입니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자니 이 얼마나 욕심입니까?
우리는 고양이들에게 '착함'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모습에 우리는 그저 웃음을 짓지요. 그들에게 시험 성적을 얼마만큼 받아오라는 말은 일절 하지 않지요. 그리고 성적으로 비교하지 않습니다. 그냥 그들은 그렇게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소중한 가족입니다. 아무런 바람 없이 그들을 대하는데도 왜 이리 마음이 풍족한 것인지요. 풍족한 마음은 다른 존재에게 조건을 제시할 때가 아니라, 그 조건을 조금씩 없애 갈 때 얻을 수 있지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