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림 시인의 시가 떠오르는 날입니다. '가난한 사랑 노래'라는 시인데요. 시의 구절 하나를 소개하겠습니다.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 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중략)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이 구절을 천천히 되뇌다 보면, 서글픈 마음이 생깁니다. 사람으로서 자유와 사랑을 추구하는 것만큼 가치 있는 일은 없을 테지만, 이는 늘 어렵기 때문입니다. 요즘 자기 개발서들을 보면 '떠나라', '그만둬라', '자신의 삶을 살아라' 등 스스로의 삶을 찾아가라는 식의 제목들이 많습니다. 진정한 삶은 '찌든 일상'을 벗어날 때라야 가능하다고 넌지시 말하는 듯도 합니다. 그러나 자유라는 것이 꼭 일상을 떠나야만 가능한 것일까요? 일상을 떠나지 않는 사람은 속박된 삶을 살아가는 것일까요?
저도 최근 들어 선생님으로서의 삶을 고민한 적이 있습니다. 농부가 작물을 가꾸듯, 선생님은 아이들의 내면을 키웁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일거수일투족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습니다. 제 그림자로도 아이들이 배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아이들은 공감과 정성으로 더디게 큽니다. 그렇기에 시간을 많이 들여야 합니다. 그 사이에서 나 스스로를 돌볼 시간도 함께 가꾸어 가야 하기에 선생님만큼이나 어려운 삶이란 없는 듯합니다.
아이들의 내면에 귀 기울이고 그들의 어려운 마음을 온전히 받아내다 보면 저도 기운이 빠지는 날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그들의 말을 들어주고, 반영하는 것만으로도 그들의 감정이 풀려가는 것을 발견합니다. 감정이라는 것은 온전히 스스로의 것입니다. 그 감정이 존중받을 때라야, 대화를 통해 연결될 수 있지요. 선생님으로서 배운 것은 그것입니다. 대화를 통한 연결이지요. 그 연결의 과정이 말처럼 쉬우면 좋으련만 올바른 공감을 통해 감정을 해소한 뒤라야 가능하기에 늘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것이지요. 그렇기에 선생님이라는 직장은 감정 노동의 비중이 타 직종에 비해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고민할 것들이 하나씩 생겨납니다. 그들과 대화를 하며 많은 시간들을 보내는 것이 과연 구속 인가 하는 것입니다.몇 자기 개발서에 따르면 이 조차도 물론 구속이고 떠나야 하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모든 것들을 내려놓고 '용기'있게 떠나라 합니다. 진정으로 그 일이 맞지 않으면 말입니다. 그러나 그 일이 맞고 틀리고를 현재의 시점에서 판단하는 일은 매우 겸손치 못한 일입니다. 저는 노무현 대통령의 말들을 참 좋아하는데요. 그분께서 하루는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어릴 적에 꿈을 갖는 것. 대단한 꿈이 아니라도 좋다."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그것은 내가 하는 일이 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운명적으로 찾아오는 도약의 시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떠날 수 있는 마음으로 가볍게 사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현재에 대한 부정으로 떠나는 마음을 갖는 것과는 결이 다릅니다. 묵묵히 일상을 감내하다 보면 얻게 되는 소소한 자유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제게는 선생님으로서 일상이 간혹 자유로운 측면이 보입니다. 김남주 시인의 '자유'라는 시에서도 말합니다. '만인을 위해 내가 일할 때, 나는 자유, 자유' 자유라는 것은 매우 추상적인 것이나 어떠한 가치를 갖고 내가 살고 있느냐가 우선으로 파악되어야 하겠습니다. 저는 '배려', '기여'라는 가치를 꽤 높은 가치로 두기에 이러한 가치를 위해 일할 수 있을 때 자유롭다고 느낍니다. 어쩌면 제게 선생님이란 직업이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함에도, 자유에 가까운 삶을 주는 것은 이러한 맥락과 닿아있는 것이지 않을까 합니다.
결국엔 타인의 성공 사례를 보고 무작정 쫓아, 일상에서의 자유를 느끼지 못한다면 그만큼 괴로운 삶이란 없는 것입니다. 일상과 놀이가 조화로울 때, 우리는 진정한 자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떠나는 것. 정말 좋습니다. 그러나 도피는 일상으로의 자유를 상실케 하니 늘 경계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