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봄의 읽기

전병근, '읽지 못하는 사람의 미래'

by 이여름

뱅크먼프리드는 암호화폐 회사 FTX를 창업한 CEO였다. 그는 책을 읽는 행위에 대해서 의문을 느꼈다. 웹서핑 몇 번이면 정보들을 쉽게 찾을 수 있는데 굳이 책에 시간을 투자하는 것은 낭비하고 했다. 우리 시대에 독서는 어떤 가치를 가질까. 오늘 동료와 함께 우리가 농사나 노동으로부터 멀어지면 어떻게 될 것인가를 두곤 진득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가 생산으로 멀어지면 공허해질 것이라고 했다. 마르크스도 소외의 개념을 '인간이 만든 것에 의해 인간이 지배받는 현상'이라고 일컬었듯, AI라는 기술이 우리를 소외시킬 가능성은 이미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그 속도가 지난 혁명들, 이를테면 1, 2, 3차 산업 혁명과는 속도와 질감 자체가 다르게 와닿는다. 일론 머스크는 이미 2030년에는 지금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변화가 우리 사회에 불어 닥칠 것이라고 인터뷰한 바 있다. 이렇게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 속에서 우리 인간이 설 자리는 차츰 사라지고 있다. 뱅크먼프리드의 말처럼, 책 읽기는 인간의 활동 중 비효율의 순위로는 손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책을 읽어야 할까?

철학자 황유원은 병든 사자가 풀을 찾듯, 병든 인간만이 책을 찾는다고 말한다. 나는 최근에야 사람이 사람을 통해 위로받는다는 사실을 깊이 느낄 수 있었다. 부끄러운 기억이지만, 대학교 다닐 때에는 내 또래 친구들의 학생 운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를테면 대학교 등록금이 비싸다는 이유를 대며 민중가요를 부르고, 함께 저항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노래 부를 시간에 더 공부나 하지'하며 그들을 지나친 것이다. 나는 그때 효율성을 생각했다. 공부가 가장 큰 효율을 가져다준다고 생각했고, 인간이 살아가는 데 가장 필요한 것은 사람이고 관계라는 것을 자각하지 못했다. 나는 사실 그들의 투쟁으로 얻은 부산물일 뿐이었던 것이다. 당시에는 그것을 몰랐다. 내가 관계의 산물이라는 것을 말이다. 황유원이 말한 병든 인간은 깨어있는 이라 할 수 있겠다. 가장 손 쓸 수 없는 사람은 자신이 건강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의사들도 그들의 치료는 이미 손을 놓는다.

병든 것에 대한 자각이 모든 치유의 시작이다. 그러나 우리는 현대 사회를 살아가며 병들었다는 자각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주의력이 빼앗겼기 때문이다. 최근 '도둑맞은 집중력'이라는 책이 유행처럼 읽혔다. 지금도 그 책을 주변 지인들이 읽는 모습을 자주 보곤 하는데, 전병근 작가는 '집중력(주체성)'은 빼앗기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것은 빼앗기는 것이 아니라, 바치는 것이라고 한다. 나는 주위 친구들이 좋은 휴대폰을 바꿀 때마다 부러워한다. 그리고는 조금이라도 더 새로운 것, 새로운 기술로 은근하게 스며든다. 내가 휴대폰을 사고 싶어 안달 난다.

마셜 매클루언은 '매체는 메시지다'라고 말한다. 우리 시대의 휴대폰은 이미 신체기관의 일부가 되었다. 조금이라도 곁에서 멀어지면 나는 불안함을 느낀다. 이는 환상통이다. 없어진 신체기관의 통증을 느끼는 것이니 말이다. AI는 우리의 몸으로 더 깊숙이 스며들었다. 그들은 우리 대신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고, 자료를 정리하고, 요약한다. 교사인 내 친구는 수업 시간에 AI를 활용해 웹툰 그리기 수행평가를 한다고 한다. 그려준 것을 내는 것인데, 그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냐며 물으면 AI에게 잘 명령하는 것도 힘이라고 한다. 효율성의 극단의 시대에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빠르게, 빠르게. 그러다 보니 우리 인간 고유의 영역을 헌납하고 있다. 병들었다는 것을 자각하는 것. 바로 성찰하는 시간을 AI에게 바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최근 뜨개질을 시작했다. 목도리를 떠서 주변 지인들에게 겨울을 잘 나길 바란다며 선물하고 있는데, 이는 멍청한 짓이다. 목도리 하나 짜기 위해서 몇 주를 품을 들여 짜야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가격이 저렴한가? 털실 가격만 해도 만만치 않다. 그러나 나는 왜 뜨개질을 지속하고 있는가. 뜨개질은 나에게 내재적 행위이기 때문이다. 뜨개질하는 그 행위 자체가 나에게 가져다주는 힘이 있다. 뜨개질을 하다 보면 잡생각들이 사라지고, 평화로운 마음이 자란다. 또 뜨개질을 하면서 영화를 보기도, 생각을 정리하기도 한다. 이러한 이유들을 다 없앤다고 하더라도, 뜨개질을 지속해야 하는 가장 큰 이유가 있다. 그것이 재미있기 때문이다. '재미'. AI가 그림도, 글도, 자료 정리도 해주는 지금, 우리는 그것을 왜 해야 하는가. 이는 효율의 논리로 볼 것이 아니다. 그것 자체가 재미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 일을 하는 것이다.

독서 또한 마찬가지다. 이동진은 독서는 재미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독서는 재미있다. 그 자체에 내재한 이유가 독서를 하게 만든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느려진다. 효율로부터 멀어질 때, 자연스럽게 우리에게는 질문과 성찰이 찾아온다. 뜨개질을 재밌게 하다 보면, 평화와 고요를 느끼는 것처럼 말이다. 읽기는 자신을 자각하게 한다. 전병근 작가는 독서가 자신과 타인을 자각할 수 있게 한다고 말한다. 독서가 돌봄인 이유는 자각을 주기 때문이다. 병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자각. 정말로 병든 사람은 병든 것을 모른다. 병들지 않은 사람은 역설적으로 병들었다고 자각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돌봄의 과제는 병든 것의 자각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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