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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콤한복이 Dec 29. 2022

겨울밤의 무드


| 추운데 나가려고?

| 불 좀 보고 나무 더 넣어놓고 올게.


시부모님 댁은 화목보일러를 땐다. 시댁에 가면 남편은 수시로 보일러를 확인하러 나간다.

아파트인 우리 집은 방바닥이 그렇게 뜨거울 때가 잘 없기에 절절 끓는 온돌바닥에 드러누워있으면 절로 잠이 쏟아지고 십 년 묵은 피로가 싹 풀린다.

가끔은 등이 너무 뜨거워 잠을 못 이루는 날도 있다. 그래도 겨울엔 방바닥이 따뜻한 것만큼 좋은 건 없는 것 같다.



그 시절 우리 집도 그랬다.  

연탄불을 꺼트리지 않고 아침저녁으로 제때 갈아주기만 하면 하루종일 방바닥이 뜨끈뜨끈했다.

특별히 잘 달궈진 아랫목은 타는 냄새가 나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장판도 아랫목은 유독 더 색이 짙었다.

달궈진 방바닥 냄새가 좋아서 아랫목에 이불을 깔고 뒹굴뒹굴거렸다.


방바닥이 식어가는 것 같으면 엄마는 바닥 여기저기를 손으로 만져보다 연탄불을 확인하러 갔다.

시간 맞춰 연탄을 갈아주었더라도 한 번씩 연탄이 빨리 타버리기도 하고, 연탄이 눅눅해져서 불이 꺼지기도 했다. 그러면 엄마는 번개탄에다 불을 피웠다.


연탄불을 갈 때는 아래에 있는 연탄과 구멍을 잘 맞춰서 새 연탄을 넣어줘야 한다.

연탄집게가 익숙하지 않아서 연탄을 깨버리기도 하고, 재가 된 연탄을 꺼낼 때 힘조절을 잘못해서 부서지기도 했지만 연탄을 가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다만 냄새가 너무 싫었다. 연탄을 갈고 나면 버릇처럼 한참을 킁킁거리며 공기를 뱉어내곤 했다.


밤새 뜨겁게 불타올랐던 새카만 연탄은 하얀 재가 되어 점점 쌓여갔다.

눈이 많이 내린 다음 날이면 얼음이 얼어 미끄러운 바닥에 연탄재를 밟아 부쉈다. 수돗가 옆 작은 밭에도, 대문 앞 골목에도, 집뒤 감나무 밑에도, 아빠가 연탄재를 날라주면 콩콩 뛰며 신나게 부쉈다.


추운 날씨에 연탄을 갈기 위해 밖으로 나가는 건 세상에서 제일 귀찮은 일이었지만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소중한 불씨를 꺼릴 수는 없었기에- 일이었다.

우리는 당번을 정해 돌아가면서 연탄을 갈았다. 밤에 내 차례가 되면 겁이 많은 나는 꼭 동생을 데리고 나갔다.

그때는 왜 그렇게도 추웠던 건지 아님 무서워서였는지, 오들오들 떨며 연탄을 갈고 들어오면 뜨끈한 이불속이 바로 천국이었다.

타다닥, 정전기가 나도록 이불속에서 비비고 또 비볐다.

방바닥에 배를 깔고 엎드려 만화책도 보고 그림도 그렸다. 연습장에다 선긋기 게임도 하고 숫자 찾기 게임도 했다.


출출한 겨울밤, 덜컹거리는 작은 방문이 열리고 엄마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고구마를 들고 왔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머리를 맞대고 모여서 고구마 껍질을 벗기기에 여념이 없었다.

아직 식지 않은 고구마를 겁도 없이 한입 베어 물다가는 어김없이 입천장을 데고 만다. 그때 엄마가 건네주는 건 살얼음이 둥둥 떠있는 동치미국물!

입천장이 다 까졌어도 그 맛을 본 이상 멈출 수가 없다. 


엄마가 매콤한 배추김치를 줄줄 찢어 고구마 위에 척 올려주면 제 아무리 목메게 하는 고구마라도 금세 꿀떡하고 넘어간다. 땅속 김칫독에서 방금 꺼내온 김장김치는 이가 시릴 정도로 시원한 맛이 일품이다.


이토록 날이 매섭기 전에 엄마는 김장을 했다. 아빠는 땅을 파고 김칫독을 묻었다. 배추김치, 무김치, 동치미까지, 김칫독이 채워지고 뚜껑이 덮였다.

아주 어렸을 때는 그것을 보고 더럽다고 생각했다.

김치에 흙도 묻을 것 같고 지렁이도 있을 것 같고 개미도 있을 것 같아서.


독에서 김치를 꺼내는 엄마옆에 앉아있으면 배춧잎 하나를 뜯어 입에 넣어줬는데 나더러 김치를 꺼내 오라 할 때면 한 손으로 배춧잎을 뜯지를 못해 독 주변으로 온통 김치국물을 흘리기 일쑤였다. 그래도 포기가 안된다. 독에서 꺼내자마자 뜯어먹는 김치가 젤로 맛나다.



| 문 열어봐, 밖에 눈 와!


고구마를 먹다가 오줌이 마려워진 나는 차마 무서워서 대문 앞 화장실까지는 갈 생각도 하지 않고 수돗가 옆 텃밭에 쪼그리고 앉았다가 반가운 마음에 소리쳤다.


그러고 보면 그때만 해도 눈이 자주 내렸는데,

내 키만 한 눈사람도 만들고 동네 친구들 모두 모여 눈싸움도 할 만큼 눈도 제법 쌓였는데,

희한하게 요즘은 경주에서 눈구경하기가 힘들다.


내 목소리에 작은 방문이 열리고 모두 밖을 내다보았다.

펑펑 내리는 함박눈 덕분에 헐벗은 엉덩이는 더 차가워졌지만 모두가 지켜보고 있으니 다행히 무섭지는 않다.


어쩌면 내일은 눈사람을 만들 수도 있겠다.

처마 끝으로 흘러내린 고드름을 따서 맛볼 수도 있겠다.


설레서인지 추워서인지 볼일이 끝나자마자 몸이 파르르 떨렸다.

뜨끈한 이불속으로 쏙 들어와 반정도 열린 문틈사이로 쌓여가는 눈을 바라보았다.

아무 말도 없이,

부디 더 많이 내려 내일 아침이면 수북이 쌓이기를 바라면서.


오밤중에 내리는 눈은 소리도 없이 우리 집 마당을 점점 밝혀갔다.

오늘 밤은 설레어서 잠들 수 있으려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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