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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콤한복이 Feb 06. 2023

밥을 말거나 비비거나

콩비지찌개


한 번씩 일부러라도 찾는 로컬푸드직매장은 대형마트보다 물건이 많진 않지만 장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일단 내가 가는 곳은 정육코너에 고기가 참 좋다.

보기만 좋은 것이 아니라 맛도 좋다. 평소에는 가까운 식육점이나 마트에서 사 먹긴 하지만 로컬푸드를 가면 구이용과 국거리 양지 한팩은 꼭 담아 온다.

그리고 과일. 특히 겨울에 딸기는 무조건이다. 이곳은 딸기재배농가가 가까운 곳이라 저렴하고 싱싱한 딸기를 먹을 수 있다. 가득 쌓인 딸기박스 앞에서 달콤한 향을 맡고도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사실 내가 로컬푸드를 찾는 진짜 이유는 채소이다.

그 종류가 대형마트만큼 다양하진 않아도 지역주민들이 직접 재배한 채소들이니만큼 장거리 유통과정이 생략되었기에 신선도가 좋고 가격도 저렴하다. 상품의 겉포장지에는 농가의 주소와 이름까지 표기되기에 더 믿음이 간다.


처음 로컬푸드직매장에 갔을 때 어린아이 주먹만 한 양파를 보고 놀랐던 기억이 있다. 그동안 내 주먹보다 훨씬 큰 양파들만 봐왔기 때문이다. 그 양파에 붙여진 가격표를 보고 또 놀랐다. 이천 원. 크기는 작지만 개수는 늘리고 가격은 줄었다. 물론 재배농가에 따라 크기도 개수도 다르고 당연히 가격도 달랐다. 오히려 나는 그 편이 낫다고 생각했고 그게 로컬푸드직매장의 가장 큰 매력이었다.


마트를 한 바퀴 휙 돌며 필요한 채소를 담고 계산대 앞에서 마지막으로 비지를 담는다. 이 로컬푸드에만 있는 고소한 비지 때문에 이곳을 자꾸 찾는다.

이곳에서 직접 두부를 만들고 남은 비지는 원하는 만큼 들고 갈 수 있는데 덤은 언제나 좋다.

비지를 좋아하는 나는 처음에 욕심을 부려 두 봉지를 들고 왔었는데 한 봉지의 양이 어마어마해서 한 끼에 다 먹지 못한 뒤로는 욕심을 버리고 한 봉지만 챙겨 온다.

이날도 조만간 비지찌개를 해 먹을 요량으로 기쁘게 담아왔다.





늦은 점심을 먹은 탓인지 저녁 할 시간이 다되어도 밥생각이 들지 않았다. 제육볶음을 먹을 거라고 냉동실에 있던 고기를 하루 전에 냉장실에 넣어둔 탓에 이미 해동이 다 되었는데 배가 고프기는커녕 더부룩했다.

저녁은 해야겠는데 고기는 생각만 해도 속이 니글거리는 통에 냉장고만 열었다 닫았다 했다.

그러다 눈에 띈 비지.


속이 좀 더부룩해서 고기가 안 당기긴 하는데 제육볶음 먹을까 아님 비지찌개 먹을까?(선택은 당신이 하세요 나는 비지찌개가 먹고 싶지만)
나는 둘 다 괜찮아. 다 맛있겠다.
그럼 비지찌개할까? 너는 어때?


큰애에게 물었다. 당연히 고기 먹자고 하겠지.


오! 비지찌개 좋지!!


오잉? 웬일이지?

사실 비지는 큰애가 좋아하는 음식은 아니었다.

어릴 때부터 가리는 게 많아서 밥 먹이는 게 제일 어려웠을 정도로 까탈스러웠다.

특히 식감이 물컹하거나 미끌거리거나 걸쭉하거나 끈적거리는 건 헛구역질을 해댈 정도였다. 

요즘 아이들이 다 그렇듯 자극적인 거 좋아하고 인스턴트 좋아하고 고기 좋아하는 아이입에서 구수한 비지찌개를 먹자는 말이 나왔으니 놀랄 수밖에. 그새 크긴 참 많이 컸구나 싶은 생각에 새삼스러웠다.


엄마, 나도 먹을 수 있게 많이 안 맵게 해 줘~


내가 먹고 싶은 음식을 가족들도 먹고 싶어 하면 요리할 기분이 더 난다.

신이 나서 냉장고를 열어 비지를 꺼냈다.

국물멸치를 한 움큼 꺼내 육수를 올려놓고 쌀을 씻어 압력밥솥에 밥을 안쳤다.

육수가 끓을 동안 콩나물을 다듬으려고 거실에 앉았더니 두 꼬마가 바짝 다가와서 앉았다.


나는 채소 다듬는 걸 좋아한다. 잔파를 다듬는다거나 고구마줄기 껍질을 벗기는 거라던지 호박잎 겉껍질을 벗기는 등의 소일거리는 잡생각도 들지 않고 심지어 재미도 있다. 그걸 딸들도 닮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나물을 다듬을 때면 TV를 보다가도 와서 거든다.

예전에 처음 콩나물을 다듬을 때 노란 대가리만 뜯으면 된다고 알려줬더니 똑, 똑, 재밌다고 죄다 부러뜨려놔서 콩나물을 들고 도망 다녔었는데, 이번에 보니 손끝이 얼마나 야무진지 괜히 웃음이 났다. 손이 빠르긴 또 얼마나 빠른지 셋이서 다듬었더니 콩나물 한 봉지가 금방 끝이 났다.

 

왜 이렇게 잘해? 이제 콩나물은 우리 딸들한테 맡겨도 되겠다!


콩나물을 깨끗하게 씻어 체에 밭쳐 물을 빼두고 대파와 홍고추, 묵은지도 조금 꺼내 먹기 좋게 썰었다.

항상 돼지고기를 잘게 썰어 넣었는데 부득이 고기가 먹고 싶지 않은 관계로 과감히 넣지 않기로 했다.

어릴 때 엄마가 해주던 비지찌개도 고기가 들어있지 않았다.

신김치랑 콩나물을 듬뿍 넣은 깔끔한 비지찌개였다. 김치랑 콩나물 건져먹는 게 참 맛있었다.


그새 육수가 진하게 우러났다. 멸치를 건져내고 비지를 넣어 풀었다. 썰어둔 묵은지와 콩나물도 함께 넣어 센 불에 끓였다. 보글보글 끓기 시작하자 맛있는 냄새가 난다. 분명 밥생각이 없었는데 얼른 식탁에 앉고 싶어졌다.

바글바글 끓으면서 농도가 맞춰지고 콩나물이 숨 죽으면 조선간장과 멸치액젓으로 간을 맞춘다. 대파와 홍고추를 올려 한소끔 끓이고 나면 드디어 식탁 위로 오를 준비가 다되었다.



구수한 냄새가 가족들을 저절로 불러 모았다.

밥 위에 콩비지 한 숟갈 듬뿍 올려 비벼먹으니 점심때 먹은 체증이 이제야 내려가는 거 같다.

밥생각 없다남편과 나는 두 그릇을 해치웠고 평소 국을 잘 먹지 않는 아들도 밥을 말다시피 해서 한 그릇 뚝딱했다. 딸들 입에는 조금 매웠는지 숟가락으로 찍어 먹듯 했지만 자기들이 다듬었다고 콩나물은 다 건져먹었다.

다행히 모두가 만족한 저녁식사였다.



날씨와 계절에 따라 생각나는 음식이 있다.

추운 겨울에는 당연히 따뜻한 음식을 찾게 되기 마련이지만 뜨끈한 음식이 많은데도 희한하게 콩비지 생각이 많이 난다.

어린 시절 소박한 밥상이 떠오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저렴한 가격에다 요리법은 간단하고 영양가도 높다고 하니 먹거리가 풍부하지 않은 겨울철에 이만한 식재료가 또 있을까. 요즘 같은 날씨에 딱 어울리는 구수한 콩비지찌개로 건강하게 속을 데우는 건 어떨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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