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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콤한복이 Apr 19. 2023

이제는 너의 차례야

아카시아 꽃 튀김


올봄은 날씨가 참 희한도 하다.

춥다가 덥다가 흐렸다가 돌풍이 불었다가 변덕이 난리도 아니다. 추위를 많이 타는 나는 벌써 4월 중순인데 아직 겨울니트가 옷걸이에 걸려있다.


거기다 미세먼지까지 더해져 온 가족이 줄줄이 감기로 몸살을 앓는 통에 아직 봄 같은 봄을 제대로 즐겨본 날이 얼마 되지도 않는데, 변덕 같은 날씨 탓만 하기에는 좀 억울한 것이 벚꽃은 벌써 다 떨어지고 없다는 거다.


날씨가 그렇게 엉망진창이었는데, 그래서 나에게는 아직 봄이 온 것 같지도 않은데, 얘네들은 달력을 볼 줄 아는 것인지 제날짜에 딱딱 맞춰 피고 졌다. 아직 즐기지 못한 나만 억울한 가운데 흐르는 시간은 절대 잡아둘 수 없다는 것을, 다만 내 마음이 따라가지 못했을 뿐.


한바탕 축제를 끝내고 벚꽃이 떨어졌으니 이제 그 꽃이 피기 시작할 것이다.






작년 이맘때였다. 시댁에 놀러 갔던 날 시부모님과 아이들까지 모두 나서 동네를 산책하고 있었다.

살랑살랑 봄바람이 불어오자 달큼한 꽃향기가 났다.

내가 어릴 때부터 좋아하던 아카시아나무(이렇게 부르며 컸지만 아까시나무가 정명이라고 한다)였다.


하얗고 뽀얀 꽃송이가 쪼로로록 탐스럽게 매달려있는 모습은 멀리서도 아름다웠다.

또한 그 향이 얼마나 진하고 향기롭던지.


어머니 아카시아 꽃 진짜 달아요?
한 번도 안 먹어봤나? 자, 한 번 무봐라.
우와! 진짜 단맛 나네요!
달지~ 안에 꿀이 한가득 들었다. 옛날에 어른들은 술 마시다가 안주로도 따서 먹고 튀겨도 먹고 찌짐도 구워 먹고 했다.
우리 오늘 이거 튀겨먹으면 안 돼요?


내 말에 아버지는 싱긋 웃으셨다.


먹고 싶으면 먹으면 되지. 뭐 어려운 거라고...


벌이 꿀을 따러 오기 전에 먹어야 한다며 어머니는 긴 가지를 앞으로 끌어당겨 꽃을 따기 시작했다. 신이 난 나도 어머니옆에 붙어서 꽃을 땄다.


아얏!
가시에 찔렸제? 조심해야 된다.


어릴 때 그렇게 아카시아나무에 붙어서 놀았는데 가시가 있었다는 걸 깜빡하고 있었다. 가시를 뜯어 침을 살짝 발라 콧등에 붙이고는 본 적도 없는 코뿔소를 흉내 내며 놀아놓고 말이다.


손끝이 아렸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꽃튀김을 먹을 생각에 설레기만 했다.

'한국인의 밥상'이나 '여섯 시 내 고향' 같은 프로에서나 봤을 법한 아카시아  튀김. 항상 그 맛이 궁금했는데 드디어 궁금증을 해소할 날이 왔으니 그럴 수밖에.


어머니는 꽃을 따고 또 땄다.

조금만 해서 맛만 보자고 하셨으면서, 빨리 집에 가서 저녁 해야 된다고 하셨으면서, 손에 닿는 꽃이란 꽃은 다 따실 작정이신지 멈추질 않으셨다.

한참 뒤에야 마음을 잡수신 건지 손길을 거두셨다.


우리 며늘이 먹고 싶다는데 맛은 보여줘야지.
아카시아꽃이 몸에 그래 좋단다. 저 높은데 있는 게 싱싱해서 더 맛있을 건데 손이 안 닿아서 안 되겠다...
이것만 해도 안될라?
충분해요~ 이것도 너무 많아요!
그래도 밑에 있는 꽃은 거의 다 땄는데요 어머니?ㅋㅋㅋ


어머니는 바람막이 점퍼를 벗으셔서 안에 꽃을 담고 소매를 묶으셨다. 어머니 옷에 꽃향기가 진하게 베일 것 같았다.


아버지, 튀김 해야 되는데 이제 그만 돌아갈까요?


말없이 싱긋 웃으시던 아버지가 발길을 돌리자 나의 발걸음이 자꾸만 빨라졌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어머니의 점퍼를 풀었더니 싸여있던 꽃향기가 우수수 흘러내렸다.




우와~ 예쁘다......



꽃을 씻으실 거라고 큰 냄비에 쏟아낸 아카시아꽃을 구경하느라 목을 빼고 있으니 물에 담그려던 어머니의 손이 어쩔 줄을 몰라 갈팡질팡하는 바람에 우리는 웃음이 터졌다.

이제 며느리의 취향을 다 알고 계신 어머니는 마음껏 꽃구경을 하도록 내버려 두셨다. ‘예쁘다, 예쁘다’ 하는 내 말에 ‘곱기도 곱제’ 하시며 장단도 맞춰주시면서.


깨끗하게 씻어낸 꽃은 체에 밭쳐 물기를 내리고 내가 꽃향기에 취해 있는 동안 어머니는 튀김반죽을 만드시고 기름을 달구셨다.


꽃잎이 여려서 튀김옷이 두꺼우면 맛이 없다.
살짝 적셔서 요래 좀 털어내고 (차르르르르르!!) 넣어야 된다.
저도 해볼게요!


어머니가 시범을 보이시고 나에게 넘겨주셨다.

튀김옷을 살짝 적시고 탈탈 털어낸 뒤에 절절 끓는 기름솥에,

촤르르르르르!


아~ 절로 힐링되는 이 소리!

바삭하게 튀겨지는 동안에도 은은한 꽃향기가 올라오는 신기한 튀김이었다. 그동안 내가 해본 튀김 중에 제일 향기로운 튀김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가장 고운 튀김이 아니었을까


그 향을 참지 못하고 튀겨내자마자 어머니와 둘이서 맛을 보았다. 세상에. 아무것도 넣은 게 없는데 이렇게 향긋하고 달콤한 튀김이라니. 맛을 본 어머니는 더 높은 곳에 있던 싱싱한 꽃을 따오지 못한 걸 아쉬워하셨다.


아버지도 맛보세요. 진짜 신기한 맛이에요!


나의 호들갑에 아버지도 싱싱한 꽃이 더 달고 맛났을 거라고 하셨다.


오빠도 먹어볼래? 향 진짜 좋아!
어. 튀겨도 향은 나네.


뭐지? 도시사람이 촌에 와서 별거 아닌 거에 신기해하는 거 같은 기분은? 나도 여기서 나고 자란 건 매한가지인데 나 혼자만 이 고운 꽃튀김이 신기한가 보다.


아이들은 맛만 보고 별로 먹지 않았다. 뭔가 이상하다고 했다.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아 웃음이 났다.

나는 보란 듯이 튀김 하나를 집어 들고서 가운데 줄기만 빼고 꽃송이들만 호로록 떼어먹으며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고 해도 아이들은 아랑곳하지 않았지만.








내가 우리 아이들 할 때 살던 동네 어귀에는 아름드리 아카시아나무가 서있었다.


잎자루 하나 꺾어서 가위바위보를 하며 작은 이파리를 하나씩 뜯던 놀이는 대체 왜 그렇게도 재미있었던 건지.

잎자루를 딱 잡고 드르르륵 아래로 잡아당기며 이파리만 뜯어내는 건 또 어떻고.


그렇게 손아귀에 가득 찬 이파리를 움켜쥐고 우리는 도롯가에 섰다. 지나가는 차를 향해 손을 흔들며 인사를 했는데 웃으며 우리의 인사를 받아주시는 분들께는 움켜쥔 손을 펼치며 꽃가루를 뿌리듯 아카시아 이파리를 뿌려드렸다.

그렇다고 차로 뿌린 건 아니었고 이파리들은 우리 머리 위에서 날렸을 뿐이었다.


매년 좋아하는 남학생이 바뀌던 시절, 하굣길에 잎자루를 꺾어 들고서 남몰래 점을 쳐보기도 했다. 그 아이도 나를 '좋아한다, 안 한다, 좋아한다, 안 한다'

'안 한다'로 끝날 것 같으면 빨리 놓아버려야 한다. 마지막 하나가 남기 전에 잎자루를 버리면 이 점은 무효니까.


꽃이 진 자리에는 어김없이 열매가 달렸다. 긴 꼬투리를 벗겨내면 콩처럼 생긴 작은 알맹이가 들어있었다. 소꿉놀이가 본업이던 우리에겐 소중한 식재료가 되어주었다.

꼬투리가 익어 따뜻한 색으로 물들고 저절로 벌어진 깍지가 바싹 말라 살짝 비틀어지면 어느새 가을이 온다.



동구밖 과수원길 아카시아꽃이 활짝 폈네
하이얀 꽃 이-이파리 눈송이처럼 날리네
향긋한 꽃냄새가 실바람 타고 솔솔
둘이서 말이 없네 얼굴 마주 보며 생긋
아카시아꽃 하얗게 핀 먼 옛날의 과수원길



온통 과수원이었던 우리 동네의 주제곡 같다며 어릴 때 참 많이 불렀던 노래처럼 아카시아나무에 꽃이 필 때면 실바람에 흩날리는 꽃냄새에 취해 나무 아래를 떠날 줄을 몰랐다.

그때는 왜 꽃을 따먹을 생각은 한 번도 못해본 걸까.

어렴풋이 차가 다니는 길이라서 먹으면 안 된다고 엄마가 일러주었던 것 같기도 하지만 그렇게 큰 나무에 탐스럽게 달려있던 꽃이 이제야 아쉬워지네.

여린 소녀감성에 꽃까지 따먹었다면 완벽한 추억이 되었을 수도 있었을 텐데. 히히.



나의 어린 시절 추억을 이야기하자면 절대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아카시아 나무라서인지 지나가다 우연히 나무를 만나면 아련하고도 그리운 이야기가 많이 떠오른다.

나에게는 아낌없이 주는 나무나 다름없었던 그 이야기들에 이제는 어머니가 따다 튀겨주신 고운 꽃튀김까지 더해져 드디어 아카시아나무 한그루가 완성된 기분이다.

그렇게 완성된 나의 아카시아나무에는 꽃도 있고 이파리도 있고 콩깍지도 있다.

웃으며 손을 흔들어주시던 친절한 운전기사님이 있고 나를 좋아한다던 그 아이도 있다.

봄이 있고 여름이 있고 가을도 있다.

언제라도 걸음을 멈추게 하는 그윽한 꽃향기가 있다.

그리고 꼭 한 번은 보고 오고 싶은 귀엽고 사랑스러운 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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