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기 며칠 전에 받아둔 취나물이 아직 냉장고에 조금 남아 있었다. 벌써 김밥도 여덟 줄 싸 먹었고 무쳐서 밥도 두 번 비벼먹었고,뭘 할까 하다가 시들어버리기 전에 장아찌나 얼른 만들어야겠다 생각했다.
오랜만에 평일 점심에 남편이 집으로 왔다.
땀범벅에 먼지를 잔뜩 뒤집어쓰고 들어온 남편은 씻고 얼른 다시 나가봐야 한다고 했다. 간단하게 라면을 먹어도 괜찮다는 말에 파스타를 하기로 했다.
라면 끓이는 게 어떤 요리보다도 자신 없고 어려운 나에게는 간단한 걸로 치면 라면보다 파스타가 더 낫다.
남편이 씻는 동안 주방에 불을 밝히고 앞치마를 목에 걸었다.
냉동실에 얼마 남지 않은 새우를 모두 꺼내 찬물에 담가 해동시켰다.
취나물은 한 움큼 꺼내 억센 줄기만 손질해서 깨끗하게 여러 번 헹궈두고 면을 삶을 물을 올렸다.
딱 네 알 남은 마늘은 편으로 썰어 두고 아이들이 없으니 살짝 매콤하게 먹고 싶어 페페론치노도 세 개 꺼냈다.
물에 담가놨던 새우를 꺼내 소금, 후추, 바질, 올리브유에 버무려 놓으면 벌써 재료준비가 끝이 났다.
한식에 비하면 파스타는 간단하고 손쉽게 할 수 있는 요리지만 그중에서도 알리오올리오는 특히 더 그렇다.
그렇게 보면 라면이야말로 물과 시간만 맞추면 되는데, 그 간단한 음식이 왜 나에게는 어려운 것인지 모르겠다.
내가 끓인 라면은 일단 맛이 없다. 면은 느끼하고 국물은 맛을 모르겠다. 그냥 냄새만 좋다.
지금껏 내가 끓인 라면을 끝까지 먹어본 적이 없다. 한두 젓가락 먹다가 면은 다 하수구행, 그나마 국물에는 김치를 넣어 다시 끓여 밥을 말아먹으면 잘 먹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다. 이런 이유로 라면을 너무 좋아하지만 누가 끓여줘야만 먹거나 아니면 아예 컵라면을 먹는 게 낫다.
보글보글물이 끓는다. 올리브유 한 스푼과소금 그리고 2.5인분의 파스타면을 넣고 면이익을 동안 한쪽에는 팬을 달궜다. 올리브유에 편마늘을 넣어 볶기 시작하자 우리가 다 아는 향긋한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음~ 맛있는 냄새. 뭐 만들어? 라면 끓이는 거 아니었어?
언제 나온 건지 마늘 볶는 냄새에 남편의 기대치가 올라갔다.
마늘향이 퍼지면 페페론치노와 밑간 해놓은 새우를 넣어 익힌다. 고소한 냄새를 풍기며 새우가 붉게 변하면 어느새 면도 다 익어간다.
파스타면 봉지에 8분 삶으라고 되어있었는데 팬에서 한 번 더 볶을 거라서 7분만 삶았다. 귀찮으니까 면은 굳이 체에 밭치지 않고 건지자마자 옆에 있는 팬으로 넣었다.
올리브유를 더 넣고 면수도 한국자 넣어준다. 소금으로 간을 맞춰가며 볶다가 면이 거의 다 익었을 때 씻어놓은 취나물을 가득 올려 살짝만 섞어주고 취나물이 숨 죽으면 불에서 내린다. 마지막으로 트러플오일을 살짝 둘러주었다.
포크로 면을 뒤적이자 트러플과 취나물의 향이 쑥 하고 올라왔다.
취나물은 향이 참 좋다. 그렇다고 호불호가 갈릴만큼 강하거나 독특하지도 않다. 식감은 질기거나 까슬거리지도 않고 부드럽다. 그래서인지 여러 재료들과 섞였을 때 튀지 않고 잘 어우러진다. 덕분에 남아도는 취나물로 여러 요리를 시도해 볼 수 있었다.
언젠가 참나물을 파스타에 넣은 걸 보고 취나물도 넣어봐야겠다 생각했다. 참나물파스타도 향긋하고 너무 좋았는데 취나물이 더 구하기 쉬운 재료라서 인지 개인적으로는 취나물파스타를 더 선호한다. 포크로 돌돌 말았을 때 면과 함께 부드럽게 말리는 것과 씹었을 때 이질감 없이 넘어가는 것도 한몫한다.
파스타가 아니면 잘 쓸 일이 없는, 우리집에서 제일 크고 무거운 접시를 꺼내 소담스레 담았다.
지난번에 담가놓은 오이양배추피클도 꺼냈다.
시중에 파는 오이피클은 신맛이 너무 강해서 입맛에 맞게 직접 만들어 먹는다. 피클은 파스타의 맛과 향을 날려버리지 않도록 적당히 새콤하고, 간은 조금 심심한 게 좋다. 그래야 파스타와 함께 먹었을 때 조화를 이룬다.
아무리 맛있는 파스타 맛집이라도 피클이 맛이 없으면 나에게 맛집으로 기억되지 않는다. 파스타 다음에 먹은 강한 피클맛만 남기 때문이다.
피클이란 것이 원래 절여진 음식이니 시고 짜야하는 게 맞지만 요즘은 냉장고도 있고 굳이 그렇게 절여서 보관할 필요까지는 없으니, 이 또한 맛으로 먹을 음식이라 하겠다.
그나저나 마지막 남은 피클 한 병의 뚜껑이 열리지 않았다.
남편이 열어봐도, 고무장갑을 끼고 안간힘을 써봐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한 입 먹다가 열어보고 또 한 입 먹다가 남편이 열어보고.
손이 아프도록 돌려도 열리지 않아 눈앞에 병째로 두고 파스타를 먹었다.
자린고비도 아니고 이게 뭐야. 눈으로 먹어야 하는 거야? ㅋㅋㅋ
아... 이 피클 마지막인데. 꼭 먹고 싶은데.
이 병 버려도 돼?
응. 어차피 안 열리면 못쓰는데 뭐. 못쓰게 돼도 좋으니까 어떻게든 좀 열어줄래?
점심을 먹다 말고 남편은 와인따개를 들고 왔다.피클을 꼭 먹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얼마나 강했던지 결국 뚜껑은 못쓰게 되었지만 피클은 맛있게 먹었다.
잘 먹었어 여보. 덕분에 또 이렇게 특식을 먹었네~ 다녀올게.
식사가 끝나자마자 서둘러 집을 나서는 남편의 뒷모습이 보았다. 가끔은 저 뒷모습이 눈에 밟힐 때가 있다.
여러 감정이 교차하지만 고맙고 안쓰러움이 제일 크다.
연애할 때 내가 제일 좋아했던 넓은 직각어깨가 중년의 나이에 이르면서 조금씩 각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은 건 기분 탓인 건지. 만만치 않은 가장의 무게를 버티느라 어깨가 점점 내려가고 있는 건 아닌지.
저 어깨 때문인 건가. 당신이 나에게 라면을 끓여주는 것과 다를 게 없는 간단한 점심이었는데 특식이라는 말에 조금 미안하기도 하고. 그래도 배부르게 먹었다니 마음이 편하다.
참으로 오랜만에 둘이 집에서 먹는 점심이었다.
시간이 많아서 집에 자주 올 때는 점심 차리는 게 귀찮기도 했었는데 어쩌다 이렇게 마주 앉아 먹으니 좋네.
냉장고 파먹는 느낌으로 만든 한 끼였는데 어쩐지 더 맛있는 것 같기도 하고 말이지.
뭐든 가끔 하는 건 이렇게 다 좋은 건가 보다.
점심을 집에서 챙겨 먹은 날은 귀찮게 여겼던 생각의 크기만큼 괜히 뿌듯한 기분도 든다.
뭔가 좀 대단한 걸 해준 것 같고, 지금만큼은 어쩐지 좀내조 잘하는좋은 와이프인 것같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