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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콤한복이 Jan 04. 2024

겨울방학 시즌메뉴

김치밥국 혹은 꿀꿀이죽


 예보가 있던 날이었다. 아침에 눈을 떴는데 다행히 속이 괜찮았다.

전날 오전에 설거지를 하다가 느껴진 메스꺼움으로 점심부터 줄곧 빈속이었다. 체한 것 같지는 않은데 갑자기 헛구역질이 나오더니 그때부터였다. 그렇다고 계속 속이 울렁거리는 것도 아니었는데 배도 고프지 않고 희한했다. 아무것도 먹지 않아서였는지 기운도 없고 피곤했다. 귀찮아서 아이들을 다 데리고 안방으로 들어가 일찍 잠에 들었다.


다음날 아침 알람소리에 겨우 눈을 떴다. 7시 반이라는데 밖은 어두컴컴했다.

핸드폰을 열어 날씨를 확인했다. 9시부터 눈이 내릴 거라고 했다. 거실로 나와 창밖을 내다보니 오늘은 정말 눈이 내릴 것 같은 날이었다.


아직 방학 전이라 학교를 가야 하는 둘째를 깨웠다. 날씨 탓인지 내가 그랬던 것처럼 아이의 눈꺼풀도 무겁긴 매한가지다. 겨울이라 늦게 출근하는 아빠와 이미 방학중인 오빠, 동생은 아직 세상모르고 자고 있는데 혼자 거실로 나와 멍하게 소파에 앉아 있는 아이가 괜히 안쓰럽게 느껴진다.


사과야, 아침 뭐 먹을래? 누룽지 끓여줄까? 아니면 요거트랑 빵 먹을래?


아이는 잠시 고민하다가 토스트를 먹고 싶다고 했다. 너무 바삭하게 굽지 않아야 하고, 반은 크림치즈를 바르고 반은 딸기잼을 발라달라고 했다. 어릴 때부터 미식가의 자질이 보이던 아이는 몽롱한 상태에서도 나름 세세한 주문을 했다. 그리고 정신이 들었는지 벌떡 일어나 리모컨을 들고 앉아 ebs를 시청했다.


아침에 이렇게 간단한 메뉴를 주문해 주면 언제나 땡큐다. 사실 엄마도 아침에 눈을 뜨는 게 늘 아쉽고 어렵다. 아이들을 깨우는 것도 쉽지 않고 기분 맞춰 살살 달래주는 것도 어려우며 준비시키는 것 또한 만만치 않다.

나도 잠자리에서 벗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몸이 정상으로 돌아오지 않았기에 귀찮고 버거울 때도 있다. 서서히 자연스럽게 에너지를 올리고 싶은데 내가 아닌 타인을 위해 강제로 움직이다 보니 매일 아침이 힘든 건 사실이다.


항상 아침잠이 부족한 느낌이었는데 전날 밤 일찍 잠자리에 든 덕분인지 오늘 아침은 상쾌하다.

구운 빵을 아이에게 갖다주고 물을 받은 냄비에 불을 켰다. 국물 멸치도 한 움큼 넣었다. 김치냉장고에서 묵은지를 꺼내 대충 가위로 썰고 소면도 한 줌 꺼내 준비시켰다.

전날 아픈 바람에 밥도 못했더니 식은 밥이 한 톨도 남아있지 않아서 어머니께서 주신 떡국떡을 두 주먹정도 물에 담가두었다.

차갑고 무거운 날씨 탓인지 전날 좋지 않던 속이 풀린 탓인지 모르겠지만 웬일로 아침부터 먹고 싶은 음식이 있기 때문이다.





어릴 때 겨울방학이면 엄마가 자주 해줬던 음식.

아침밥을 먹고 식은 밥이 어중간하게 남으면 엄마는 그랬다.


낮에 김치밥국 쒀먹을까?


언니들이나 동생들은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김치밥국을 꽤 좋아했다.

진한 멸치맛국물도 좋고 국물에 풀어진 묵은지도 좋고 칼칼한 국물에 적셔진 국수면발도 좋고 수저를 뜨기 전에 엄마가 떨궈주는 고소한 참기름냄새도 좋고.

한 가지 죽이 된 식은 밥이 조금 맘에 안 들었을 뿐 김치밥국은 내 입맛에 딱이었다.


겨울이라 김장을 새로 했으니 묵은지를 처리해야 했을 것이고, 방학이라 삼시세끼 차려내야 하는 압박감도 있었을 것 같다. 그래서 엄마는 유독 겨울방학에 김치밥국을 그렇게 쒔는지도 모르겠지만 그 덕에 나에게는 겨울방학의 대표적인 제철음식이 되었다.

매콤하고 뜨거운 김치밥국을 정신없이 먹다 보면 애고 어른이고 콧잔등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술을 자주 드시던 아빠에게는 속풀이 음식으로 그만이었고 김치와 국수를 좋아하는 나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식사였다. 또한 메뉴부담 없이 간편하게 끓일 수 있으니 엄마에게도 효자메뉴였을 거라 짐작해 본다.


날이 추울수록 뜨거운 음식이 생각나기 마련이지만 향수로 음식을 먹는다 해도 과언이 아닌 나는 추운 겨울만되면 호호 불어먹던 따끈한 김치밥국 생각이 간절했다.

신혼 초 어느 겨울에 김치밥국이 유독 먹고 싶던 날이 있었다. 그게 뭐냐고 묻는 남편에게 끓이는 법을 설명해 주고 먹지 않겠냐고 했더니,


꿀꿀이죽 말하는 거 아니야? 난 그거 별로 안 좋아하는데.. 어릴 때 엄마가 자주 해줬는데 나는 별로...


그냥 묻지 말고 해 먹었어야 했는데. 그 말을 들은 뒤엔 차마 모른 척 그 음식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정말 단 한 번도 남편에게는 해주지 않았던 음식을 오늘 아침으로 짜잔~! 깜짝 준비를 한 것이다. 그렇다고 싫어하는 남편에게 억지로 먹이려는 건 아니고 오로지 내가 먹고 싶어서, 나를 위해서.





엄마의 방법대로 멸치가 부들부들해지도록 잘 삶아서 건져내고 잠시 불을 꺼뒀다. 김치밥국은 조리시간이 그리 길지 않아서 가족들이 일어날 때까지 기다렸다.

그 사이 사과는 등교를 하고 나는 대자로 자고 있는 막내딸의 어깨에 코를 박고 이불을 덮었다. 거실에 있을 때는 그렇게 춥다고 생각되지 않았는데 따뜻한 이불속에 들어오니 으~ 하고 오히려 몸이 떨렸다. 이미 잠이 달아난 뒤였지만 늦잠은 생각만 해도 달콤하다.


내가 옆에서 너무 떨어댄 건지 다시 누운 지 10분도 채 되지 않았는데 막내가 눈을 떴다. 다시 재우려고 아직 밤이라고 거짓말도 해봤지만 통할 리가 없다. 발끝으로 커튼을 살짝 젖혀보더니


엄마 이렇게 밝은 밤이 어디 있어?


하더니 거실로 팽 나가버렸다. 배고프다고 노래를 부르는 아이 목소리에 남편도 배를 긁으며 거실로 나왔다.


얼른 육수를 다시 끓였다. 진한 멸치냄새에 궁금했는지 남편은 냄비 속을 들여다봤다.


뭐 하는 거야?
밥도 없고 그냥 김치밥국 끓이려고.
별로 안 먹고 싶으면 오빠는  빵 먹어도 돼.
괜찮아. 나도 먹을래.
김치밥국 먹는다고? 별로 안 좋아하잖아. 안 먹어도 괜찮아. 빵 구워줄까?
응. 빵도 먹고 그것도 조금 먹고. 둘 다 먹을래.


그래 그러면 내가 조금 덜 미안하지 싶었다. 싫어하는 걸 알면서도 굳이 했으니까. 기분 좋게 빵을 구워냈다.


뽀얀 육수가 다시 끓었고 썰어둔 김치를 쏟아부었다. 떡도 퍼질 수 있게 미리 넣었다. 말랑말랑 해진 떡이 하나둘 떠오르고 국물을 살짝 떠서 간을 봤다. 아! 이거지 이거야. 약간 심심한 간은 액젓으로 맞췄다. 그리고 소면을 무심하게 반으로 툭 부러뜨려 흩뿌리듯 넣어주었다. 고명으로 대파를 가위로 대충 송송 끊어 넣고 후추를 뿌린 뒤 불을 껐다.

벌써 입에 침이 고이기 시작했다.


오빠 얼른 건이 깨워!



작은 국그릇에 (우리 집 국그릇은 정말 작다. 가끔 밥그릇으로 쓰기도 한다) 꽉 담았다. 뜨거워서 그릇을 들 수 없을 정도로  담았는데도 양이 적어 보였다. 얼른 면기를 사든가 해야지.

내 건 특별히 소면을 더 많이 담았다. 다른 반찬도 필요 없이 동치미만 꺼내 앉았다.



예전에 우리 엄마가 그랬듯이 나도 참기름을 숟가락에 가득 부어 세 그릇에 고루 나눠 따랐다. 숟가락으로 휘휘 저었더니 뜨거운 김이 피어올랐다. 젓가락으로 소면을 가득 집어 입에 넣었다.


아 시원해. 이제야 속이 풀리는 거 같네.
응 좋다. 맛있네!


한입을 먹자마자 목이 아닌 배꼽아래에서 목소리가 나왔다.
전날 속이 안 좋아서 하루종일 굶은 사람이 맞는지, 금세 한 그릇을 비우고 한 그릇을 새로 채워 다시 시작했다. 뭐가 그리 급했는지 서둘러 삼켜내고 마지막 한 숟가락이 남았을 때 참기름을 넣지 않았음을 깨닫고 아쉬워했다.

평소 아침을 잘 먹지 않는데 두 그릇이나 먹고도 속이 더부룩하지 않았다. 기분 탓이었는지 날씨 탓이었는지 속도 풀리고 입맛도 되찾아서 컨디션을 회복한 나는 기분 좋게 설거지를 끝냈다. 그리고 벼르던 면기를 주문했다.

이 그릇에 한 그릇이면 될 것을 두 번 세 번 퍼다 먹는 수고스러움을 덜기 위해서. 나도 깔끔하게 한 그릇만 딱 먹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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