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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콤한복이 May 31. 2023

부부의 세계


앞머리는 길면 자르고 싶고 자르면 기르고 싶은 걸까.

무슨 바람이 분 건지 1년이 넘도록 겨우 기른 앞머리를 갑자기 자르겠다고 미용실에 갔다.

머리를 고정하고 앉아 눈을 감고 있으니 머리카락이 잘려나가는 소리와 무심하게 켜져 있는 티비소리만 났다.

소란하지 않은 티비에서는 어떤 드라마가 나오는 중인 것 같았다.


다들 그렇게 살아요.
부부가 평생을 뜨겁게 사랑할 수는 없잖아요
뜨겁게 사랑하진 않더라도 최소한 존중은 해야죠


평생 뜨겁게 사랑하며 사는 부부는 없는 걸까. 

결국은 다 그렇게 되고 마는 걸까.






연애때와 신혼 그리고 지금.

그러고 보면 우리도 참 많이 변했다.

우리가 가장 뜨겁게 사랑했을 때는 아무래도 연애 때였겠지.

로에게 보다 적극적이고, 나보다 당신이 우선이고, 무엇을 줘도 아깝지 않고, 더 해주지 못해 아쉽고, 무엇이든 용서가 되고, 어떤 모습도 사랑스럽고, 나로 인해 웃으면 몇 배 더 기쁘고, 함께 하고 싶은 것들이 늘어날수록 가슴 벅찼던, 다시는 오지 않을 우리의 연애.

좋은 것 투성이지만 피곤한 것도 사실이다.

예뻐 보이고 싶고 사랑받고 싶고 자꾸 뭔가 해주고 싶어서.


그리고 결혼.

콩깍지가 벗겨지지 않아서일까 서로 필요에 의해서였을까. 아무튼 우리는 결혼을 했다.

연애 3년 동안 한 번도 다툰 적이 없었던 그와의 결혼생활이 마냥 행복하지만은 않았다. 꿈꿔오던 알콩달콩한 신혼과는 거리가 멀었다. 귀빈들을 모시고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하겠노라 맹세한 우리는 다투고 또 다퉜다.


너무 다르게 살아온 사람들임을 증명이라도 하듯 작은 습관들 하나하나 다 부딪혔다. 결혼하고 보니 3년을 어떻게 그렇게 연애했나 싶을 만큼 우리는 다른 것 투성이었다.

연애할 때는 나와 너무 잘 맞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결혼을 잘못한 건 아닐까 하는 걱정과 함께 살짝 후회가 될 정도였다. 그렇게 서로에 대한 적응기간은 정확히 1년이 걸렸다. 그리고 우리는 거짓말처럼 편안해졌다.



잊을만하면 해결하지 못한 숙제가 튀어나와 별것도 아닌 일로 마음에 생채기를 내기도 하고 그럴 때면 세상에 저런 원수가 또 있을까 싶었지만 해가 지날수록 그런 마음은 조금씩 다듬어지고 둥글어져 다. 

우리가 함께 살아온 시간만큼 서로에게 맞춰지고 익숙해져서인지 처음만큼의 열정적인 사랑은 아닌 것 같다. 한때는 마음이 변한 건 아닐까 서운한 감정이 들기도 다.






언젠가 티비에서 어느 노부부를 본 적이 있다.

함께 산지 몇 년이나 되었냐는 물음에,


88년째입니다


88년을 함께 사셔서인지 웃는 모습이 똑 닮아있었다.

좋아하는 반찬도 같고 낮잠을 주무시는 모습도 닮았다.

사랑하는 사람과 아직까지 함께하고 있다는 것이 기적이라며, 깊게 주름이 패인 손을 꼭 맞잡고서 지금 잡은 이 손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말씀에 울컥했다. 

세월에 변해버린 모습도 예뻐해 주고 사랑스럽게 봐주는 이가 있어 거울 속 주름진 자신의 모습이 밉지 않다.

앞으로 함께할 날들이 길지 않을 것 같아 하루하루가 소중하게 여겨진다.

그것도 사랑이다.

젊은 날의 그것처럼 불타오르지는 않지만 방식이 다를 뿐 이렇게 평생 뜨겁게 사랑하는 부부도 있는 것이다.

두 분은 그 긴 시간 동안 서로 양보하고 이해하며 상대를 위해 기꺼이 나를 변화시켰다. 둘만의 속도로 여전히 사랑하고 계셨다. 따뜻하게 그윽하게 깊게.






어느 부부에게나 남들은 알 수 없는 둘만의 세계가 있다.

둘이서 함께 지켜내야 할 것들과 지켜주고 싶은 것들, 같은 목표를 가지고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 것과 때론 그로 인한 다툼도, 혼자였다면 하지 못했을 일들과 둘이기에 가능하게 했던 것들, 남들에게는 의미 없는 아주 사소한 것일지라도 너와 나이기에 특별한 그 모든 쓸데없는 것들까지도 다.

너로부터 시작되어 나에게까지 연결된 우리만의 이야기는 매일매일 조금씩 커져간다.


새삼 부부라는 인연이 세상의 어떤 인연보다도 신기하고 놀랍다. 그리고 생뚱맞다.

남남으로 살던 우리가 어떻게 하루아침에 아는 사이가 되었으며, 어떠한 이치로 부부의 연을 맺게 된 건지는 몰라도 익숙함에 가려져 내 옆자리를 당연하게 여기지는 않아야겠다.

그럭저럭 허송세월을 보내고 훗날 남은 시간 앞에서 후회하지 않도록, 변해가더라도 변함없이 서로를 바라봐주기를.

따뜻하게. 그윽하게. 깊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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