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오후 아이들이 놀이터에 간다고 해서 나도 바람이나 쐴 겸 따라 내려갔다. 아이들은 킥보드와 자전거를 구석에 주차해 놓고 놀이를 할 거라고 달려가버리고 혼자 벤치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조금 뒤 내가 앉은 테이블 위에 어떤 사람이 와서 핸드폰을 놓았는데 굳이 고개를 들어 쳐다보진 않았지만 모자를 고쳐 쓰고 있는 것 같았다.
"엄마 나 저거 태워줘"라는 남자아이의 말에 "그래 엄마랑 같이 가보자" 하는데, 그 목소리가 너무나 익숙하게 들렸다. 궁금한 마음에 얼굴을 보려고 고개를 들었지만 이미 테이블 위의 폰을 들고 뒤돌아선 후였다.
키도 크고 마른 몸에 긴 생머리의 뒷모습이 너무 예뻤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아는 사람인 것 같지 않았다. 그 사람이 멀어지는 걸 보고 다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야, 이쪽으로 와"
잠시 뒤 다시 그 목소리가 들렸고 순간 어떤 얼굴이 떠올랐다. 20년도 훌쩍 넘은 중학교 시절의 한 친구, 얼굴도 보지 못하고 목소리만으로 오래 전의 얼굴이 생각난다는 게 신기하기도 했지만 진짜 그 얼굴이 맞는지 확인하고 싶어졌다.
두 눈이 그 사람을 졸졸 따라다녔지만 깊게 눌러쓴 벙거지모자 때문에 얼굴을 분간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가슴아래까지 기른 생머리가 옆모습조차 방해했고 슬쩍 코끝과 입술을 볼 수 있었지만 긴 시간의 공백 때문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중학교 시절, 수줍음 많고 조용한 나를 잘 챙겨주던 친구가 있었다. 등굣길에 꽃다발을 건네기도 하고 예쁜 색의 펜도 선물해 주고 내 생일도 챙겨주었던 고마운 내 짝.
학기 초에 그 아이의 글씨체가 너무 특이하고 귀여워서 노트정리를 하는 모습을 나도 모르게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친해진 우리, 공부도 잘하고 쾌활한 성격이라 두루두루 친구도 많았는데 그런 내 짝을 너무 좋아했던 또 다른 친구가 있었다. 내 짝이 나에게 그러듯 그 친구는 내 짝에게 선물을 하고 옆에서 챙겨줬다.
그 친구는 우리가 삼각관계라며 장난처럼 말했다. 내가 싫은 건 아니지만 내 짝이 너무 티 나게 나를 좋아해서 질투가 난다는 이야기도 솔직하게 하던 그 애는 서글서글 큰 눈에 오뚝한 코, 얇은 입술에 쭉 뻗은 다리까지, 구석구석 참 예쁘던 친구였다. 시작이 그래서였는지 늘 가까이서 함께하면서도 절친한 사이가 되지는 못했는데 가끔 한 번씩 그 애는 어떻게 컸을까, 여전히 예쁠까 궁금하던 날들이 있었다.
그 목소리를 오늘 놀이터에서 듣게 될 줄이야.
물론 그 친구라는 확신은 아직 없지만.
얼마뒤 남자아이가 집에 들어가자며 그 사람의 팔을 끌었다. 끝내 벙거지모자 아래 저 얼굴을 확인하지 못했구나 싶어 아쉽던 참이었다. 엄마와 오빠를 부르며 쫄래쫄래 따라가던 여자아이와 눈이 마주쳤는데 신기하게도 내가 기억하는 그 얼굴이 겹쳐 보였다. 그제야 뒤를 돌아 멀어진 친구를 바라봤다.
역시 네가 맞았구나! 고운 아들 하나와 딸 하나를 뒀네. 나와 비슷한 시기에 아이를 낳았겠다. 딸은 어딜 가도 엄마 닮았다는 소리 많이 들을 거 같아.
세월이 이렇게 흘렀는데 어쩜 목소리가 그대로인지. 그나저나 그땐 우리 키가 비슷했는데, 혼자서 언제 그렇게 훌쩍 커버린 거야.
너도 나를 기억하고 있을까?
다음에 다시 만나면 인사할 수 있을까.
목소리뿐이었지만 정말 반가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