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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콤한복이 Jan 05. 2024

이제 겨울방학입니다

도서관 문닫는 날


수요일 오후. 아이의 학교 도서관에 "책 나눔 사서 봉사"를 나가고 있다.

지원서를 제출할 때 지원사유란에  "책냄새를 좋아합니다"라고 쓸 정도로 단순히 사심을 채우려고 시작했는데 이제는 2시간인 게 아쉬울 정도로 즐겁다.


처음 도서관에 갔을 때 나를 본 아이들의 반응이 재미있었다.

요일마다 나오는 사람이 다르다 보니 "누구세요? 하는 아이부터 "또 사서선생님이 바뀌었어요?" 하는 아이도 있고 "어디서 왔어요?", "언제 왔어요?"라고 묻기도 했다.

대출과 반납에 버벅대는 나를 보고 오히려 차근차근 설명해 주던 스위트한 아이도 있었고 아직 청구기호가 헷갈리는 나에게 '흔한 남매시리즈'를 찾아달라고 했던 아이는 나를 졸졸 따라다니다가 결국 실망과 원망을 가득 안고 돌아가기도 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흔한 남매시리즈처럼 인기 많은 책은 서가 반대쪽에 따로 정리되어 있었더랬다.


생각보다 많은 아이들이 도서관을 찾았다. 아이들은 쉬는 시간에 한꺼번에 들어오기 때문에 책을 대출해 주고 반납하기만도 정신이 없을 때가 있었다. 반납한 책들은 북카트를 채우고도 모자라서 흘러넘쳤다. 이 책들을 다 정리하고 집에 가고 싶은데 마음만 굴뚝같았다. 그래도 책을 읽으러 밀려드는 아이들이 대견하기만 했다.


선생님 이거 빨리 찍어주세요. 빨리요 빨리!
어 그래 그래, 그래. (삑) 잘 가~


누구는 쏜쌀같이 달려와 대출만 해서 나가기도 했고 누구는 도서관 구석에 가방이며 옷이며 다 벗어두고 자리를 잡았다.


선생님 50분 되면 알려주세요
저 방과 후 가야 돼요
알겠어. 15분 정도 남았다~


내 말을 듣긴 한 건지 어느새 책에 시선을 고정하고 깊이 빠져 들었다.

또 어떤 아이는 도서관에 들어서자마자 바닥에다가 가방을 내리고 지퍼를 열어서 무언가를 꺼냈다. 뭐 하는 건가 하고 일어나 아이를 봤다.


선생님 이거 좀 보세요. 오늘 배워서 만든 거예요


아이가 꺼낸 건 핸드니팅으로 만든 열쇠고리였다.


처음 만들어본 거예요. 근데 잘했죠?


귀여웠다. 키도 덩치도 나보다 큰데 아이는 아이구나 싶었다. 나에게 자랑을 다했는지 다시 주섬주섬 가방을 싸고는 안녕히 계세요 하며 도서관을 나갔다.


1년을 다니다 보니 자주 오는 아이들의 얼굴은 저절로 익혀졌다. 그중에 유난히 기억에 남는 한 소녀가 있다.

또래보다 작지만 안경을 쓰고 아주 똘똘하게 생긴 친구다. 안 그래도 예쁜 애가 책도 많이 읽고, 고운 목소리로 차근차근 공손하게 말하는 것도 모자라 인사성은 또 어찌나 좋은지, 꼭 눈을 마주치고 허리 굽혀 인사하는 예의까지 바른 그 친구를 볼 때마다 항상 기분이 좋아졌다. 학교 축제하던 날 우연히 합창단원으로 서 있는 그 애를 보고 얼마나 반갑던지. 내 딸도 아닌데 계속 그 애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나저나 너는 노래도 잘하는 거야? 어머님이 누구니? 어떻게 너를 이렇게 키우셨니?


지난 20일은 겨울방학 전 마지막으로 도서관을 개방하는 날이었다. 이제 대출은 끝났고 반납만 받았다. 그래서인지 그날은 도서관이 조용했다. 덕분에 서가를 둘러보며 잘못 꽂힌 책도 정리하고 쌓인 먼지를 닦으며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였다. 1학년인 듯싶은 여자아이가 들어와서는 나를 빤히 쳐다보고만 있었다.


반납하러 왔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할 말이 있는듯하여 기다렸다. 아이는 손을 꼼지락거리며 저학년 특유의 느릿느릿 귀여운 말투로 아주 어렵게 말을 했다.


저 선생님.. 학원 숙제하고 가도 돼요?


학원 갈 시간이 다 되었는데 숙제를 깜빡하고 못했다고 했다. 교실은 문이 잠겼고 밖은 추워서 이리로 왔다고 덧붙였다. 너무 귀여워서 자리를 안 줄 수가 없었다. 구석에 앉아 사각사각 글씨를 쓰며 종이를 몇 장 넘기더니 그새 숙제를 다했다며 꾸벅 인사를 하고는 도서관을 나갔다.

그 애가 나가자마자 1학년 남자아이 하나가 들어와서는 나에게 우유를 내밀었다.


선생님, 이거요
이거 뭐야? 나 먹으라고 주는 거야?
네~ 우리 반 선생님이 갖다 드리래요
네가 몇 반인데?
6반이요
.......


일면식도 없는 6반 선생님께서 어쩐 일로 나에게 우유를 갖다주라고 하셨을까? 일단은 고맙다고 하고 우유를 받아뒀다. 잠시 뒤 사서선생님께 얘기했더니 크게 웃으시며 어쩐지 그 친구가 어머님께 우유를 버리고 간 것 같다고 하셨다. 저학년들은 우유를 먹기 싫어 종종 도서관에 와서 선생님께 드리고 간 적이 많았다고. 황당하면서도 귀엽기도 하고 웃기기도 하고, 우유를 먹기 싫은 마음을 누구보다 백번 이해하면서도 어린아이답지 않은 노련한 말솜씨에 깜짝 놀랐다.


이제 마무리 정리를 끝내고 도서관 문을 닫을 시간이 다가왔다. 아까부터 서가 끝쪽에 앉아 책을 읽던 아이에게 다가가서 마감시간을 알렸다.


잠깐만요, 쪼금만 더요.
이제 3장 남았어요. 쪼금만요


아이가 책을 읽으면서 서서히 걸었다. 걸음과는 반대로 두 눈은 다급하게 움직였다. 마침내 마지막 장을 덮고 책장에 책을 꽂으면서 아이는 투정 아닌 투정을 부렸다.


아직 방학식도 안 했는데 왜 벌써 문 닫아요?
대출도 안 해주고...
근데 대출은 왜 안되는 거예요?


하루종일 몇 번이나 대답해 주었던 말. 도서관 문밖에 저렇게 많은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리지만 도서관에 들어오지 않는 아이들은 관심도 없는 일일 텐데, 책 대출이 안 되는 게 세상 큰 일인 양 아쉬워하며 물어오는 아이들이 얼마나 기특하게 느껴지던지. 방학이 좋으면서도 도서관이 문 닫는 게 젤 아쉽다는 말이 나오는 어린아이의 입이라니. 감동스럽지 않을 수가 없다.


곧 방학이잖아~ 책꽂이가 더 추가될 거라서 방학하기 전에 책정리 다시 하고 정리하려고 그래.
대신 방학 때 수요일마다 도서관 개방하니까 꼭 놀러 와, 알았지?
방학 때는 귀찮아서 안 와지는데... 일단 알겠어요.
안녕히 계세요~
잘 가~ 겨울방학 잘 보내고 꼭 놀러 와.


그렇게 마지막 손님을 보내고 고요해진 도서관을 한 번 돌아보았다.

누군가 지난 1년 중 무엇을 가장 잘했냐고 묻는다면 구태여 순위를 매기지 않더라도 도서관에 나간 일이 손가락 안에 들지 않을까.

무언가를 얻을 거라고 시작하지 않았기에 그럴 수도 있다. 대단한 것을 바라고 한 일이 아니었기에 더 좋았을지도 모른다.

새로운 인간관계가 생긴 것도 아니고 돈이 생기는 것도 아닌데 대체 뭐가 그렇게 좋았냐고 한다면 글쎄 그저 아이들을 보는 거랄까.


도서관에 오는 아이들은 비슷하다.

성향과 성별과 모습이 다르지만 닮았다. 책을 좋아하는 공통점이 있기 때문에 결국 비슷하다.

남들은 화장실 가기에도 바쁜 그 짧은 쉬는 시간에 도서관에 들러 책을 본다는 것은 사실 쉬운 게 아니다. 좋아하는 책은 달라도 그 마음이 같기에 애정이 간다. 애정이 가는 아이들이 읽는 책에 관심이 간다.

늘 우리 아이들이 책을 많이 읽기를 바랐는데 지금 여기서 책을 읽는 아이가 내 아이가 아니어도 좋았다. 독서중인 아이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내 마음이 이럴 수도 있구나.

이게 그저 대리만족이었다고 하더라도 좋았으니까, 직접적이고 자극적인 영향 없이도 충분히 채워지고 쉬게 해 줬으니까.

어린 시절 다락방에서 책을 읽으며 꿈을 키웠던 내가 내내 떠올라 저절로 힐링이 되었으니까. 마지막날 사서선생님께서 따로 준비해 주신 꽃꽂이 힐링프로그램이 딱히 필요치 않았을 만큼. 적어도 나에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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