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과 도시, 그리고 언어
타이포그래피, 알 것 같으면서도 같으면서도 생소하다.
우리의 생각을 표현하는 수단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 근본에는 언어가 있다. 의도를 정확하게 전달하기 위해 사람들은 언어를 기반으로 한 잡지, 서적, 사진, 그림, 다이어그램, 음악 등을 통해 이를 드러내고자 한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글자 그 자체가 주목받는 경우는 그렇게 흔하지 않다. 타이포그래피는 글자에 주안점을 두면서도 미적인 측면이 결합하여 보다 넓은 예술 분야를 다룰 수 있는 여지가 있는 분야이다. 문자를 언어적으로 타인에게 전달하기 위해서는 조형 구조를 통한 구체적인 형태를 나타냄으로써 많은 이들에게 공통된 지각 반응으로 인식시켜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해당 분야는 활자의 시작과 끝, 각도, 내외부의 채움, 직선과 곡선, 낱말 사이의 거리 등을 다양한 방향으로 배치하거나 활용하여 표현하고 있다. 즉 문자를 보다 쉽게 읽고, 사람들로 하여금 매력적으로 보일 수 있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시각 언어’로서의 기능을 해내고 있는 타이포그래피는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일상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즉 타이포그래피는 도시 내에서 다양한 방면으로 해석된다. 낯선 도시에 들어가게 된다면 가로 표지판, 간판의 글꼴로 자신이 ‘어느 곳’에 들어와 있음을 알게 된다. 언어를 받아들이면서, 글자 자체가 가지고 있는 가독성, 심미성이라는 요소를 시각적으로 확보함과 동시에 공간의 이미지를 느낄 수 있다. 더 나아가 도시의 역사성이나 경관을 볼 수 있게 하고, 그 아이덴티티를 표현하는 수단으로 창출되고 있다.
도시와 거리 속의 타이포그래피를 통해 그 형태를 알아보자.
첫 번째 도시는 미국의 수도인 뉴욕이다. 이곳의 타이포그래피를 통해 도시 내의 복잡성과 다양성을 엿볼 수 있다. 뉴욕의 브로드웨이와 그 중심지에 있는 타임스퀘어는 인구 밀도와 더불어 글자의 응집도가 세계에서 가장 높은 지역 중 하나이다. 복잡한 길의 특성을 가졌기 때문에 뉴욕의 맨해튼에서는 이정표를 흔하게 볼 수 있다. 맨해튼에서 필수적인 도로명 표지판과 일방통행 표지판, 경고판과 신호등이 한꺼번에 있는 모습이다. 또한 과거에는 WALK, DON’T WALK와 같이 문자로 된 신호등도 있었다. 뉴욕은 본래 그림보다는 글씨의 사용이 월등하게 높은 표지판들이 많았는데, 문맹과 복잡성 등의 문제로 사라진 것들을 다시 한번 떠올려보게끔 한다. 영미권에서는 i와 j와 l, 그리고 f와 t가 헷갈리기 쉽기 때문에 이를 주의해서 표기한 것을 볼 수 있다. 뉴욕의 교통국은 도시 속의 모던함을 강조하기 위해 인터스테이트에서 헬베티카로 글씨체를 변경하였다. 헬베티카는 획의 굵기가 일정하며, 내용의 객관성에 중심을 두고 사용되는 서체이다. 조금은 정돈된 다양성을 보여줄 수 있는 뉴욕의 거리와 표지판은 이를 전해주기에 충분하다. 간결하고 반듯함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변형된 서체들은 다인종이 살고 있는 국가 중 매우 상징적인 도시인 뉴욕의 당당한 성격을 나타낸다.
물론 뉴욕의 거리에는 정돈된 표지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있는 그대로의 다양성을 담고 있는 곳들 또한 많다. 다듬어지지 않는 날것의 결과물은 과감한 시도로 독특한 재미를 주기도 한다. 캘리그라피 등으로 직접 그림을 그려 글씨를 만든 상점 간판, 자간을 극단적으로 줄여 누군가를 압박하는 듯한 경고문, 도시의 한구석에 커다랗게 쓰여 있는 문구는 인상적이면서 다채로움을 인정하는 포용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두 번째로 소개할 도시는 일본의 요코하마다. 일본 내에서 해외의 문화를 가장 먼저 받아들인 곳인 요코하마의 타이포그래피를 통해 도시의 이미지를 어떤 방식으로 창출하는지를 볼 수 있다. 과거에서 벗어난 미래 지향적인 전환점의 기질은 변화하고 있는 도시 경관뿐만이 아니라 여러 디자인에서도 나타난다. 점점 확대되는 세계화를 효과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체계를 구축함과 동시에 일본이라는 국가의 정체성 또한 담은 타이포그래피가 곳곳에 존재한다. 특히 ‘21세기 항구도시의 미래’ 프로젝트를 통해 디자인을 형성함과 동시에 본래 일본이라는 지역적 특수성을 가진 문화와도 자연스럽게 결합한 경관을 만들어 내었다. 요코하마시는 ‘고나’, ‘신고’, ‘나우’ 체 등을 일문 지정 서체로, 영문은 ‘헬베티카’, ‘유니버스’, ‘프루티거’체 등을 사용하도록 하고 있다. 이러한 서체들은 기존의 일본 서체의 구조와 틀을 바탕으로, 정돈되며 중성적인 느낌을 낸다. 현지인은 물론 도시에 방문한 외국인들이 알기 쉬워 간판이나 표지판에 시각적인 질서를 부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추가적으로 그림과 글자의 경계가 확실한 편에 속하는 일본 디자인의 특성을 바탕으로, 요코하마에는 그림을 설명하기 위한 타이포그래피도 눈에 띈다. 일러스트의 느낌에 맞춰 폰트가 선택된 경우도 적지 않다. 캘리그라피도 비슷한 영역이다. 기존 서예의 틀에서 벗어나 글자를 디자인적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다. 정확한 정보(information)를 전달하고자 하는 영역에는 깔끔한 느낌의 포용성이 높은, 무언가를 홍보하거나 드러내는 데에는 문화를 바탕으로 한 자유로운 서체가 등장하였다. 이들이 적절히 융합되어 요코하마의 아이덴티티를 만들었다.
마지막으로 소개할 도시는 우리가 살고 있는 한국의 도시, 서울이다. 우선 서울의 타이포그래피로부터 과거부터 층층이 쌓여왔던 역사적인 맥락을 느낄 수 있다. 개화기부터 서울 내에서 문물이 빠르게 들어왔던 종로는 한양의 중심이었다. 1910년을 시작으로, 종로에는 작은 한옥들 속 간판들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지난 2010년에 열린 <종로 엘리지> 전에는 과거 수십 년간 종로를 지켜온 곳인 ‘르네쌍스다방’, ‘보신주단’, ‘보령약국’ 등의 기록을 엿볼 수 있었다. 종로의 경관에는 여러 종류의 타이포그래피들이 차곡차곡 쌓여있다. 88 올림픽을 기점으로 상점들에 다양한 종류의 서체를 주체로 하는 간판이 달리게 되었다. 현재와 그 사이 시대의 변화에 따라 많은 것들이 나가기도, 들어오기도 하며 지금의 뿌리가 깊은 종로 상권과 경관을 만들어 내었다. 시간의 켜에 따라 층층이 만들어온 종로의 풍경은 서울의 역사성을 보여줄 수 있다.
또한 서울의 타이포그래피를 통해 현재 기업과 개개인의 사업체 자본의 투입으로 변모해 가는 도시의 특징을 엿볼 수 있다. 특히 가로수길에는 새로운 요소들이 그 전의 것들을 빠르게 대체하고, 조금은 경쟁적이고 단호하기까지 한 관계 속, 거리의 대부분의 글자가 빽빽하고 요란하게 자신을 드러내고 있었다. 높아진 지가와 지대를 감당할 수 있는 상업적인 브랜드들이 몰리게 되면서 건물과 마찬가지로 글자의 공간도 빈틈이 없었다. 특히 밤에 이 글자들은 번쩍번쩍 빛나며 꺼지지 않는 서울의 열기를 대변하고 있는 듯했다.
최근에는 코로나19와 개인주의의 여파로, 한국에서는 배달 어플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일종의 문화 의식으로서 ‘배달의 민족’이라는 업체가 많은 기업들 사이에 성행하고 있다. 앱을 실행하면 가장 먼저 나오는 화면에는 배민 글씨체로 가득하다. 사람들은 이를 이용하며 알게 모르게 서체를 접하며 알아간다. 특히 ‘배민 한나체’는 타 사이트에서 사람들이 보게 되면 바로 해당 기업이라는 것을 알 정도로, 상징성이 두드러진다. 한나체는 특유의 키치함과 B급 감성을 드러내는 데 효과적인 역할을 하여, 여러 가지 마케팅에도 사용되고 있다. 이처럼 IT 기업이 향후 한국의 디자인과 문화시장에 어떤 영향력을 줄 것인가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다른 나라들처럼 서울도 고유한 인상의 서체가 있을까. 서울 한복판을 천천히 걷다 보면, 서울한강체와 서울남산체를 발견할 수 있다. 서울의 거리나 공공장소의 안내 사인, 간판이나 공식적인 문서에도 서울 서체가 쓰이며 도시에 일관성을 부여하고 있다.
서울 서체는 조형적으로 한옥의 열림과 기와의 곡선미를 표현하여, 조선시대부터 이어져 왔던 한글의 단아함과 무한한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서울이라는 지역이 가지고 있는 한강과 남산을 활용하여 문화적인 자긍심을 높이고 있기도 하다. 이처럼 도시 속에 숨어 있는 글자는 곧 도시가 살아온 역사와 현재의 가치를 담아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앞으로 있을 타이포그래피에도 이전의 맥락을 이어 감과 동시에 자생적으로 존재할 수 있을 만한 조화로움이 필요할 것이다.
도시는 글자 하나하나가 모여 만들어진다. 글자가 소시민이라면, 글자의 여백과 간격은 사람 사이의 관계며, 이로 인해 만들어진 문장은 곧 ‘어떠한 공동체’다. 문장이 적절히 배열되고 그것이 마침내 종이 바깥으로 나올 때, 도시는 하나의 언어이자 그만의 ‘아이덴티티’로서 기능할 수 있다. 그래서 글자 사이사이를 잘 읽을 수 있게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도시의 레이아웃을 맞추기 위해, 개개인과 집단, 사회, 사람 사이의 거리의 정도와 일종의 여백이 얼마나 조화롭게 배치되는가를 끊임없이 탐구하고 알아가는 것.
건축가는 그런 일을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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