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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NI Sep 25. 2017

거울을 보는 이유


아이들은 거울을 잘 보지 않는다. 애써 스스로의 면면을 살필 필요가 없는 것일까. 유년시절을 떠올려 보면 딱히 거울을 볼 일이 없었다. 학교 세면대에서 손을 씻다가 고개를 들면 장난처럼 마주치는 정도. 따져보니 어른 사람인 나는 거울을 자주 본다. 화장실이나 달리는 버스 안에서도 한 번쯤 거울을 확인한다. 화장을 고치거나 옷매무새를 확인하려는 정도로 본다 해도 거울이 있으면 자동인식 센서가 달린 듯 고개가 움직인다. 확인할 것이 없는데도 본다는 것이다.


나의 첫 아르바이트는 보습 학원에서 국어와 논술을 가르치는 일이었다. 한참 편입 준비를 하면서 오전 중에 학원이 끝나면 네 마리에 천 원 하는 붕어빵을 점심으로 먹으며 학원에 도착한다. 두 마리까지 먹으면 성공. 열 개 남짓한 책상 교실에 엉덩이를 붙이자마자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이친다. 아이들에게 어른의 말은 이해 여부를 넘어 당연하게 받아들여진다. 아이들을 가르친다는 것은 뭐든 그릴 수 있는 도화지를 제공한다기보다 이미 점선으로 그려진 그림에 색을 입히는 법을 알려주는 일이기도 했다. 지문을 이해해야만 하는 질문이 아닌 창의력을 요구하는 질문에도 "이렇게 하는 게 좋다", "이런 표현이 좋다"는 식의 약장수 멘트를 했다. 현금이 담긴 월급봉투를 받을 때 가끔 내가 사기꾼 같았다. 스마트폰을 조금 많이 본다는 변화를 빼면 아이들은 여전히 맑다. 말랑말랑한 마음으로 어른의 말을 듣는다. 매일 꿈이 바뀌는 아이도 있고 아무 생각 없어 보이는 아이도 있다.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지금껏 봐온 아이들은 자신이 타인에게 어떻게 보여야 한다는 것에 별 감흥이 없었다.

  

거울을 자주 보는 어른이 된다는 것은 들여다보고 싶은 구석이 많다는 걸 감추고 있다. 보고 또 봐도 완벽한 일이란 없다. 표정을 드러내는 일보다 감추는 일이 더 많고, 하고 싶어서 하는 일 보다 해야 할 일들의 무게를 감당해야 할 때가 있다. 누군가의 평가는 스스로 내린 답보다 지극히 광범위하고 주관적인 범위에 놓여있다. 힘들다고 하면 힘들겠다는 말보다 힘내라는 용기의 말을 더 많이 듣는다. 쏟아내고 싶은 감정이 담긴 그릇이 요란하게 떨리다가도 꾸역꾸역 제자리로 돌아가는 기분이었다. 타인과의 관계는 적당하지만 감정의 거리는 좁혀지지 않는 생활을 한다. 가끔은 감정이 고일 일이 없는 어른의 세계가 편하기도 하지만 원인을 알 수 없는 외로움이 밀려온다. 그 메마른 틈을 책을 읽거나 그림을 보러 다니고 무언가를 배우는 것으로 채우기도 했다.   


 「혼자 있는 시간의 힘」을 쓴 사이토 다카시는 자신과 대화를 하기 위해 거울을 보는 연습을 했다고 한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눈동자를 보고 내면의 상태를 바라보는 훈련을 통해 자신을 이해해 보는 것이다. 오직 혼자만이 할 수 있는 이런 행동을 통해 '나'와 이야기를 나누고 고독에 익숙해져서 어떤 일이든 다시 맞설 수 있는 힘을 기른다는 논리다. 예전에 잦은 실패 때문에 자신감이 떨어진 사람에게 거울을 보고 자신과 대화를 해 보라는 처방을 해주던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떠올랐다. 생각보다 쉬워 보여서 한 번 따라 해 봤는데 처음 보는 타인을 마주한 것 같은 기분에 허탈하게 웃기만 했다. 해프닝처럼 끝나버린, 쉽지 않은 일이었다.  


만약 눈도 깜빡이지 말고 숨만 쉬면서 가만히 있으라고 하면 제대로 참아낼 사람이 몇이나 될까. 간지러우면 긁고, 코를 파고 싶으면 파고, 제자리에 놓인 물건을 수도 없이 떨어뜨리는 아이들의 두서없는 서투름이 왠지 부럽다. 그런 면에서 특별한 이유 없이 거울을 보는 건 작은 허점도 드러내지 않으려는 무의식적인 행동이자 '나'를 바라보는 일에 스스로가 미묘한 거리를 두고 있다는 것은 아닐까. 바라보는 나와 보이는 나 사이에서 온전한 나를 찾는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거울을 보고 싶은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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