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커피 시간을 가진다. 만사가 귀찮은 날에도 하루에 커피 한 잔은 꼭 마신다. 커피의 매력은 매일 마셔도 질리지 않는다는 거다. 장소와 시간, 함께 하는 사람, 오늘의 기분 정도, 심지어 날씨에 따라서도 미묘하게 다른 맛을 가지고 있다. 하루 종일 바쁘게 보내다가 멍해지는 때가 있다. 아무것도 잊은 게 없는 데도 어딘가 허전한 느낌이 들 때는 커피를 마셔야 한다는 신호이다.
평소 출근을 할 때는 아무래도 시간에 쫓기는 기분을 지울 수 없다. 게다가 커피를 제대로 마시지 못하고 나온 상황이라면 버스나 지하철을 타기 전에 커피를 사야 할 때가 있다. 마음은 급한데 커피는 마시고 싶어서 대중교통 앱을 켜고 몇 분 후쯤에 버스를 타야 할지 확인한다. 1, 2분 후라면 포기하는 게 낫지만 5분 정도면 커피 한 잔을 사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지하철 역 안이나 버스 정류장 가까이에 있는 커피 전문점은 주문을 하자마자 곧바로 커피가 나온다. 유동인구가 많은 곳에 위치한 카페이다 보니 어딜 가나 빠른 손으로 커피를 척척 내준다. 테이크아웃 잔에 마시는 커피는 카페에 앉아 마시는 커피와는 느낌이 달라도 버스의 창 밖을 바라보면서 즐긴다고 생각하면 나쁘지 않다. 요즘엔 차를 더 많이 끌고 다녀서 버스를 거의 타지 않지만 10년 넘게 대중교통으로 출근을 하면서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뜨거운 아메리카노 마시기 전문가가 되었다. 이제는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맛있게 마실 수 있다.
얼마 전에 종각역 쪽 서점에서 한참을 보내다가 커피 생각이 났다. 인스타그램에서 저장했던 카페가 생각나서 찾아갔는데 상가 건물 3층에 있는 곳이었다. 오래된 상가 건물 계단을 오르면서 ‘여기에 카페가 있을까?’ 싶은 마음이 들 때쯤 오른쪽으로 오후 두 시의 햇빛이 가득 들어찬 카페가 보였다. 커다란 원목 테이블이 눈에 들어왔고 통창 유리 너머로 보신각이 보이는 카페였다. 서울 한복판이라고는 느낄 수 없을 만큼 음악이 낮게 흐르는데, 맑은 통창 너머로는 옛 건축물과 고층 건물이 우뚝 서 있고, 그 사이사이를 오래된 나무가 너울거리고 있었다. 플랫 화이트를 주문했다. 사실 카페에 머물 수 있는 시간이 별로 없어서 마음이 급했다. 정적인 카페 분위기와 달리 분주한 나는 급한 듯 사진을 찍고 자리에 앉았다. 햇빛이 얼굴로 강하게 내리쬐는 오후였다.
“10초만 있다가 드세요!”
바리스타가 자리에 다가와 유리잔에 담긴 플랫 화이트를 놓으며 말했다. 그 말이 어찌나 기분 좋게 들리던지. 어딜 가도 커피를 언제 마시라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었는데 지금까지 마신 플랫 화이트와는 왠지 다를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아무래도 스팀 우유에 에스프레소가 맛있게 섞이는 시간을 말씀해 주신 것 같았다. 그 말을 듣자마자 고개를 끄덕거리며 마음속으로 십 초를 셌다. 기다림의 십 초는 짧고도 긴 시간이었다.
커피를 파는 사람과 만드는 사람은 다른 것 같다. 소위 ‘물장사’라고 부르는 카페가 아닌 자신만의 사소한 철학을 가지고 맛을 창조하는 사람들이 대단하게 느껴진다. 그것을 느끼는 건 맛을 만들고 누리는 사람의 자유이지만 적어도 만드는 쪽에서 ‘이렇게’라는 법칙을 가진 것은 다르다. 그 말의 마법 때문이었을까? 지금까지의 플랫 화이트를 다 잊을 만큼 맛있게 마신 한 잔이었다. 쌉싸름한 기분이 들기도 전에 부드럽고, 그렇게 몇 번 넘기다 보니 바닥을 보였다. 바닥을 보고도 또 잔을 들어 버렸다. 인스타그램으로 알고 분위기에 혹해 들어간 카페인데 색다른 경험을 했다. 핸드드립이 날씨와 물 온도, 드립의 정도에 따라 다른 맛을 내듯 같은 종류의 커피라고 해도 또 다른 맛을 느꼈으니 말이다. 플랫 화이트는 라테에 비해 스팀 우유의 양이 적어서 라테의 에스프레소 버전이라고도 볼 수 있다. 스팀 우유의 달착지근한 부드러움과 에스프레소의 강렬한 조합을 느끼고 싶다면 플랫 화이트를 추천한다.
나는 느린 커피를 선호한다. 누구나 오늘을 버티거나 잠시 쉬기 위해서 마셔야 하는 커피보다 조금은 느린 커피를 더 원할 것이다. 마음이 급할 때 빨리 마시는 커피를 제외하고는 주로 카페에서 완완이 있는 걸 즐긴다. 그래 봤자 최장 두 시간을 못 버티지만 그건 단지 머무는 시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커피가 천천히 나오는 카페를 좋아한다. 기다리는 시간이 지루하지 않을 만큼 여유로운 날에 카페에 가서 커피를 주문하고 언제 나올지 기다리는 게 좋다. 그것도 커피 맛에 포함되는 즐거움이랄까.
주문을 하고 지갑에 카드를 넣기도 전에 커피가 나오는 곳은 특별한 때를 제외하고는 별로이다. 여러 사람들하고 우르르 카페에 가는 날에도 핸드 드립을 시키는 일이 종종 있다. 항상 내 커피는 가장 늦게 나온다. 그런데 커피만큼은 그런 기다림의 시간이 좋다. 바리스타가 적당량의 원두를 분쇄하고, 오늘의 온도와 습도에 따라 공기를 맞은 원두가 손길을 따라 흘러내린다. 때에 따라 원두를 선택할 수 있다는 것도, 기다림을 필요로 하는 커피라는 사실도 좋다. 드립 포트에 담긴 그대로 커피를 주는 곳도 있고 꽃 장식이 화려한 잔에 담아 주거나 군더더기 없는 깨끗한 잔에 내주는 곳도 있다. 핸드드립은 카페에 따라 어떤 잔을 주어도 식상하지 않은 매력이 있다.
세상엔 SNS에 담기 좋은 예쁘고 맛있다는 카페가 넘쳐나지만 태풍의 눈처럼 고요하게 즐길 수 있는 커피 시간이 늘어났으면 좋겠다. 글을 쓰다 보니 또 커피 생각이 간절하다. 조만간 시간을 들인 커피를 마시러 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