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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NI Nov 21. 2017

외로움의 할당량

고독사는 아니에요


나이가 많은 사람들을 좋아한다. 왠지 나이가 많은 분들은 세월의 더께가 두둑한 이야기 하나쯤은 갖고 있을 것 같다. 지하철의 노약자석이나 고궁, 탑골 공원, 종로 뒷골목을 좋아하고 거리를 지날 때도 나이 지긋한 분들을 관찰하는 버릇이 있다. 특히 손을 꼭 잡고 다니는 노부부나 멋쟁이 할아버지, 할머니를 보면 가슴이 두근거린다. 이 증상은 나이 듦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람의 막연한 호기심이기도 하지만 나와 주변 사람들의 어슴푸레한 미래에 대한 예습이기도 하다. 20, 30년 후의 내 모습부터 우리의 반경 안에 누가 있고, 어떤 대화를 나눌지 생각하다 보면 언젠가 혼자 남거나 혼자 남을 소중한 사람의 모습이 먹먹하게 떠오른다.   


독거노인이 한창 뉴스나 다큐멘터리에 주제로 등장하다가 요즘에는 고독사가 더 큰 사회 문제가 되었다. 혼자 산다는 게 어느 날 발병한 것을 알게 된 정도라면 고독사는 손 쓸 수 없는 상황을 직면한 것과 다름없다. 내겐 팔순이 넘은 외할머니가 계시다. 일찍 남편을 보내고 더 씩씩하게 살아가야 했을 할머니는 김장철이 되면 성인 남성도 들기 어려운 배추 몇 킬로그램을 거뜬히 들 정도로 건강하시다. 매일 노인정에 가서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고, 아이들을 좋아하셔서 가끔 초등학교에 급식 배급을 하는 일을 하면서 용돈도 벌어 쓰신다. 정갈한 할머니의 방에는 거울과 서랍장이 일체형인 나무 화장대 아래 초등학생용 글씨 쓰기 교본이 놓여 있다. 언젠가 책에 대해 여쭤보았더니 해사하게 웃으시면서 심심할 때 글씨 연습을 하려고 뒀다고 하셨다. 할머니가 팔순이 되던 해부터는 엄마와 함께 살고 있는데 오랫동안 혼자 지냈던 탓인지 누군가와 함께 사는 게 오히려 더 불편하신 것 같다. 엄마는 자식한테 푹 기대지도 않고, 아쉬운 소리도 잘 하지 않는 할머니에게 서운해하기도 하지만 매일 뭘 드시라고 권하고, 뭐든 안 먹고 안 한다 내빼는 할머니의 귀여운 다툼을 보면 저런 게 함께 살아가는 건가 싶다.


얼마 전 고독사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세상에 혼자 남는다는 게 무엇일지 생각했다. 상상만으로도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일본은 구직 활동을 뜻하는 준말(就活)이 죽음을 준비하는 활동(終活)이라는 말로 변형되어 생길 만큼 고독사가 심각한 사회적 문제이다. 심지어 발음도 같다. 우리나라에서도 매년 고독사로 외롭게 죽는 1인 가구가 늘어나고, 노인뿐 아니라 취업과 학업을 위해 혼자 사는 20· 30대까지 그런 일이 생긴다고 하니 보통 심각한 문제는 아니다. 방송에서 본 독거노인들은 경제적으로 자유롭지 않고, 몸이 아프거나 사람들과의 교류가 거의 없는 상황이었다. 자식이 있는데도 뒷바라지를 하느라 정작 자신은 종이나 플라스틱을 주워서 판 돈으로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분도 있었다. 그렇게 매일 발품을 팔아 모은 돈과 기초연금은 40만 원 남짓이다. 고개를 저으며 “팔자 더러운 사람은 안 되는 거예요”라고 하는 할아버지의 눈빛엔 헤아릴 수 없는 삶의 무게가 느껴졌다. 거동이 불편해서 매일 집에만 계셔야 하는 한 할머니는 유일하게 일주일에 한 번 방문하는 생활 지도사가 소통의 창구이다. 생활지도사는 할머니의 말벗도 하고, 먹을 것도 챙겨준다. 그 밖에 일주일에 두어 번은 전화로 짧게 안부를 전한다. 생활지도사가 떠나고 현관문이 철컹이는 소리가 나면 다시 할머니는 혼자이다. 할머니의 손에는 늘 손수건이 있다. “나이가 들면 자꾸 눈물이 난다”라고 하시면서 연신 눈물을 훔친다. 적막한 집 안에 텔레비전 화면이 돌아가는 소리만 윙윙거린다.


수전 손택은 「타인의 고통」에서 전쟁이나 학살과 같은 재앙을 겪은 사람들의 모습이 담긴 사진이나 영상을 자극적이고, 충격적인 이미지로서 소비하는 현실에 대해 경계를 드러낸다. 그녀의 말대로 어떤 시대보다도 가장 빠르고 명쾌하게 모든 소식을 사진, 영상으로 보고 들을 수 있는데 그만큼 그들의 고통을 ‘잘’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방금 누군가의 죽음을 인터넷 기사로 보면서 잠시 감정의 동요를 느끼다가도 또 다른 ‘사건’을 보려고 다시 인터넷 기사를 살피고 있지는 않은지 두려웠다. 고독사는 4,5년 전부터 다큐멘터리로 제작되고 뉴욕에서 제작 상까지 받을 만큼 이슈가 되었지만 현실은 고독사로 돌아가신 분들에 대한 짤막한 기사만 사실 전달에 그치고 있다. 최근에는 고독사로 돌아가신 분이 살던 곳을 전용으로 청소하는 업체의 글과 유족이 장례를 원하지 않아서 빈소가 없는 고독사 전문 장례식에 대한 내용들이 많았다. 몇 년 전 독거노인에게 대한 기사들을 보면서 걱정만 했던 나는 또다시 고독사라는 문제 앞에서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컴퓨터 앞의 정적인 스스로에게 질렸고, 고작 글로써 그들의 슬픔을 짐작하고 있다는 사실에 또 한 번 놀랐다.   


산다는 건 함께 있으면서도 각자의 외로움을 짊어지는 일인 것 같다. 한때는 한 나무에서 싹을 열고 잎을 틔웠지만 언젠가 나무도 모르게 홀연히 떠나야만 하는 일이다. 나이가 들수록 새로운 만남의 설렘보다 누군가를 떠나보내야 한다는 두려움에 노출된다. 수많은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며 살아가면서도 결국 떠날 때는 혼자라는 숙명을 벗어날 수 없다. 그리고 그 숙명은 우리 모두가 맞닥뜨려야 할 무언의 약속이기도 하다. 사람들과 섞여 있을 때는 혼자의 시간이 간절하지만 막상 혼자가 되고 고독의 시간이 채워지면 사람이 그리워진다.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한 것은 다시 사람들 안으로 이입할 수 있는 좋은 전제가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고독의 시간이 채워져도 계속해서 ‘혼자’라는 적막을 반복한다는 건 너무 슬픈 일이다. 그 슬픔이 결코 혼자가 된 사람만의 몫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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