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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NI Nov 27. 2017

책살이 라이프


책장을 편다. 첫 장을 넘기지 않고서는 미지의 물건일 뿐인 이것을 마음의 빗장을 열고서 읽어 내린다. 활자는 가만히 말을 걸어온다. 책장이 넘어가는 소리는 바스락대는 잎사귀 소리를 닮았다. 잠시 세상의 속도는 유예되고, 오직 읽는 사람의 의지로 시간이 흘러가는 기분이다. 종이의 향과 질감, 가지런한 활자, 뜻을 내포하고 있음을 감당하기엔 너무도 가벼운 무게. 이 모든 것들이 내가 종이책을 좋아하는 이유이다. 계절의 마디가 매번 새롭게 느껴지는 것은 반복이 아닌 순환의 미를 보는 눈에 있듯이 매일 쏟아지는 책 속에서 좋은 책을 만나는 일은 일상을 낯설게 보는 힘을 준다.


세상의 속도가 아무리 빨라져도 바꿀 수 없는 두 가지가 뭐냐고 묻는다면 주저할 틈도 없이 걸음과 책 읽는 속도라고 할 수 있다. 여유 있게 걷는 사람을 보기 힘든 세상이다. 지하철의 계단을 두고도 에스컬레이터를 뛰듯이 오르내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움직이지 않는 그림자가 된 기분이다. 군중 속에 있어도 사람들은 좀비처럼 손에 든 휴대폰만을 응시한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영어 단어집, 신문, 책처럼 종이로 된 것을 보는 사람들이 꽤 있었는데 이런 변화가 아직도 어색하기만 하다.


천 가방이 몸에 닿는 안쪽에서 책을 꺼내 책갈피가 꽂혀 있는 곳을 펼치면 책은 휴면 상태에서 해제된다. 웅성거리던 주변은 암전 되고, 나와 책만이 남는 기분이다. 그저 책을 읽는 행위가 아닌 주체의 온 감각을 책 속에 이입시키는 일은 자신만이 만들 수 있는 속도이다. 그런 면에서 책은 홀로 있음을 그 자체로 완벽하게 만드는 최선의 물건이다. 보르헤스의 「지상의 양식」을 통해 지금 이 순간의 행복을 배웠고, ‘사랑해야 한다.’로 끝나는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을 읽으며 주변 사람들을 떠올렸다. 아버지를 떠나보냈을 땐 롤랑 바르트의 「애도일기」를 읽으며 이별의 통렬한 아픔을 위무했다. 책은 언제든 쉬어갈 수 있는 동굴이 되어주었고 지금도 일상에 무한한 여백을 제공하는 지침서 역할을 하고 있다. 언젠가 지금보다 더 빠른 세상이 들이닥쳐도 유유자적 책장을 넘기는 백발의 할머니가 되고 싶다.


문학상을 통해 등단을 해야만 작가가 된다고 인식되었던 예전과 달리 요즘에는 독립 출판 시장이 힘을 키우는 추세다. 작은 책방 또는 독립출판이라는 이름으로 다양한 개인의 창작물도 작품으로서 가치를 인정받는다. 올해 서울 국제 도서전에서는 전국 각지의 독립 서점이 모여 ‘서점의 시대’라는 이름으로 특별 기획전을 했다. ‘문학과 죄송사’라는 이름으로 등단하지 못한 예비 시인들의 낙선된 시를 모아놓은 책이 있는가 하면 손으로 쓴 여행 일기, 퇴사를 결심한 사람의 이야기 등 대형 서점에서는 볼 수 없는 개성으로 가득한 책들을 만날 수 있었다. 또 대형 서점에서 크게 주목받지 못했어도 충분히 가치 있는 책들을 서점 주인만의 안목으로 골라서 알리기도 한다. 책을 읽은 주인의 생각이 적힌 띠지를 만들거나, 인상 깊은 부분에 가감 없이 밑줄을 긋고 포스트잇을 붙여 책을 고르는 독자의 마음과 접점을 만드는 식이다. 이런 출판 시장의 흐름은 배울 점도 많고, 반가운 일이다.


평생을 걸쳐 만날 수 있는 사람과 경험의 한계치가 있듯이 세상에는 죽을 때까지 읽어도 다 읽지 못할 책들이 차고 넘친다. 읽을 책이 많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기도 하지만 어딘가 쓸쓸한 구석이 있다. 그런 아쉬움은 뒤로 하더라도 좋은 책 한 권을 만나는 순간만큼은 나는 현재를 잘 살고 있다고 느낀다. 미처 몰랐던 것들, 평생을 경험해도 부족한 미지의 영역을 든든하게 채워주니 지금을 살면서도 다양한 '만약'의 영역을 추체험하는 셈이다. 아름다운 문장에 밑줄을 긋고, 소리 내어 읽어보고, 독서 노트를 쓰면서 책 읽기의 즐거움을 배가시킨다. 전국 각지에 있는 작지만 단단한 서점을 다니면서 서점의 공기가 뭍은 책 한 권을 사 오는 것도 책을 즐기는 방법이다. 책이 있는 공간과 서점 주인의 취향이 오롯이 담긴 작은 서점들이 천천히 오래 남아주었으면 좋겠다.


책 읽기는 쓰고 싶다는 마음을 동반한다. 일상에서 발견한 섬광 같은 순간을 기록한 나의 글이 누군가에게 닿는다면 정말 짜릿할 것이다. 읽는 사람이 곧 잠재적인 쓰는 사람이 되어 누구나 자유롭게 출판할 수 있고,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는 상상을 한다. 언젠가 서울 국제 도서전에서 열린 신달자 시인의 작가 대담에서 시인은  "순간은 영원해요. 순간에 충실한 것이 신이 준 선물입니다. 지금 바로 여기가 소중한 거예요. 몸이 게을러도 의식은 항상 어딘가로 올라가고 있어야 해요."라는 말을 했다. 작가의 말을 듣고 메모하면서 가슴이 뛰었다. 지금 이 순간의 소중함을 알고 의식의 흐름을 놓치지 않는 삶을 이어주는 끈이 책에도 있음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막연한 미래를 미리 걱정하고, 지나온 과거를 반추하는 것보다 순간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며 살고 싶다. 그래서 오늘도 활자의 간격에서 쉬고, 나아가는 책살이의 삶을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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